한줄 詩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 이원하

마루안 2021. 4. 2. 19:53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 이원하


몸을 녹이기 위해 창문을 닫으니
잘살아 보라는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속을 드러냅니다

나는 가뿐해진 몸으로
개 대신 기르는 신경초를 건드립니다

건드리니 신경초의 어깨가 움츠러듭니다
내 손이 아직 차가운가봅니다

몸을 제대로 녹이기엔 난방이 좋지만
가스통은 회색이라 아껴야 합니다
속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아껴야 합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게 사람을 닮았습니다

닮았다니까 좋은가요?

움직이는 신경초가 얼마나 예민하게요

대답해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눈이 내려도
밖으로 나와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 수 있는
의자를 하나 살까요
사람 때문에 무너져본 적 없는
잘 살던 의자를요

아니다, 앞으로 자주 울지 않을 거니까
아무 의자나 살까요
고민이네요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할까요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필 꽃 핀 꽃 진 꽃 - 이원하


봄에 태어났으니 봄에만 살면 좋을 것 같아서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는 섬으로 이사를 갔다
바다 한가운데 놓인 화분 같은 섬이었다

수국 옆에 집을 구한 것을 시작으로
때가 되면
부용 옆으로 동백 옆으로 갈대 옆으로
주황 곁으로 파도 사이로 이사를 갔다

일년 내내 꽃이 피는 곳이면
일년 내내 봄일 거라 생각했으나 살아보니
녹아내리다가 우연히 시원했고
얼어붙다가 따뜻한 기운이 한두 번 찰랑였다

밥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시들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고 생각하기를 멈췄다

필 꽃 안으로 빠져나가듯 들어가 밥을 먹었다
숨이 멎을 것처럼 안전했다 안전은 잠시 뿐이었다

핀 꽃 위에서 포만감이
미끄러지듯 내려왔고 소화를 시키려

진 꽃
을 손에 들고
버리러 갔더니,

버리고 와서야 알았다

 

 

 


# 이원하 시인은 1989년 서울 출생으로 연희미용고, 송담대학 컬러리스트과를 졸업했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가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간의 경계에서 - 조하은  (0) 2021.04.02
그믐달 - 심명수  (0) 2021.04.02
섬진강이 궁금하다 - 이운진  (0) 2021.04.01
새점을 치다 - 안채영  (0) 2021.04.01
4월의 부사(副詞) - 천수호  (0) 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