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믐달 - 심명수

마루안 2021. 4. 2. 19:59

 

 

그믐달 - 심명수


뚜껑은 열리고 밤은 아직 발효 중이다

밤의 항아리 속이 구리다고 속단하지 말자
지문을 찍어본 사람이면 알리라
판이하게 드러나는 음과 양
나는 그 음과 양의 어두운 항아리 속에 가라앉아 있다
한 여자가 침몰된 나를 한 바가지 떠간다

먹먹하다
날숨에서 피어나는 별들
별은 항아리 속 숨구멍
나는 무엇인가에 자꾸 익숙해지는 걸까

다시 한 여자 얼굴이 떴다
여자는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곤 한다
지상에서 아직도 여자는 그 구간을 흐른다
여자여, 그만 뚜껑을 닫아주오

아, 나는 항아리 속에서 발효 중이다
피안을 위한 침잠
밤은 이제 뚜껑을 닫고
밤물결 따라 노를 젓는다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상상인

 

 

 

 

 


그 노총각이 쓸쓸하다 - 심명수


난로 위 주전자, 주전자가 열이 바짝 올라 있다

꼭지 달린 모자 눌러 쓴 주전자는 콧대가 높다. 감기라도 걸리면 코마개 할 때도 있다. 그러면 가래 끓는 목 가다듬으면서도 철없이 태평소를 불어 댄다.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놓고 아랫목 같은 그 주변으로 둘러앉아 젖은 깃 털듯 마른 손을 비벼대며 태평소 이야기에 젖곤 했다. 그러나 이젠 찾아주는 이라곤 잠시 왔다 간 사무실 미스 홍 한두 잔 뜨거운 커피물만 콜록콜록 따라 갈 뿐, 사람들에게 태평소는 시끄러운 소음일 따름이다.
주전자는 얼굴 가득 침통한 기색으로 화끈거린다. 줄담배를 피운다. 수음하듯 뿜어 대는 찬식의 비음. 난로는 푸무처럼 쉼 없이 불을 뿜어내고 주전자는 매번 모자만 벗었다 썼다 할 뿐, 속이 타는 자의 갈증을 알아주는 이 없다. 구수한 보리차, 생강 조각을 썰어 넣고 목 가다듬어 한없이 불던 태평소, 이제는 한 모금 훌쩍이며 적실 이도 없다.

밤새도록 달아 있는 난로 위 사내의 아랫도리가 쓸쓸하다.

 

 


*시인의 말

내 몸에는 
사슴벌레, 장수하늘소, 풍뎅이가 계절을 잊은 채 서식한다
밤마다 시퍼렇게 시달리는 
이 가려움증
열 마디 손가락 활짝 펼쳐도 족족 잡히지 않는
꿈틀거리는 빛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