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그리운 꿈 - 서상만

그리운 꿈 - 서상만 봄이면 대각댁(大覺宅) 마당, 누런 보릿대 타는 냄새 천지를 덮어 더 배고팠던 날 꿈에서까지 따라다닌 그 가난 이제는 살 만도 한데 왜 울 어머니 꿈마다 저러실까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촛불 켜 손이 닳도록 빌고 비는 어머니 모습을 새벽꿈에 또 보았다 이승과 저승이 멀긴 먼 모양 아직도 이승 형편을 자상하게 모르시고 애태우신다 "어머니 이제 그만 시름 놓으세요!" "아니다 아니다" 어머니는 정화수 앞에 두 손을 모아 빈다 별이 다 질 때까지 *시집/ 월계동 풀/ 책만드는집 낙화심서(落花心書) - 서상만 아, 이렇게 지는구나 꽃은 지는 그 찰나에 자신을 알았을까 고백하건대 그간 참 잘 살았다 꽃이었던 한때 난 누구에게 그토록 황홀했고 누구에게 그토록 그렁그렁한 눈물이었나

한줄 詩 2021.04.11

우는 냉장고 - 윤석정

우는 냉장고 - 윤석정 ​ 비 그치고 안개가 이불처럼 펼쳐진 새벽 젖은 나무들이 게워낸 꽃봉오리는 이역만리에서 달려온 저번 생들의 발바닥 이번 생을 살고자 저번 생이 딱 한 번 꽃신 신고 북쪽으로 행군할 채비를 했고 때마침 비는 나무의 발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겨우 목숨만 챙겨 왔다 내 마음에서 사는 것들은 안개보다 더 희뿌옇고 죽음에 얼룩진 발바닥을 가졌다 발바닥을 디뎌야 일어날 수 있듯 나는 죽어야 살아나는 것들을 생각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갓던 개구리들이 개울가로 기어 나와 알을 낳고 밤낮으로 울었다 우는 소리를 엿듣다가 방문을 닫으면 냉장고가 방구석에 웅크린 채 쉴 새 없이 울었다 마음을 열어젖히고 다 내어 준 서러운 목숨들 나는 내 마음에서 죽은 것들을 생각했다 *시집/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한줄 詩 2021.04.10

돌아오지 않는 날 - 김윤배

돌아오지 않는 날 - 김윤배 심장에 무거운 침묵을 올려 떠나는 여행이었다 지친 나비의 날개를 위로하기 위해 흰 꽃들의 하염없는 낙화를 눈물짓기 위해 설레었던 순간의 깊은 화인을 지우기 위해 계절 내내 흔들리는 눈빛을 위해 마침내, 떨림을 감추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속죄일 거라고, 속죄여야 한다고 가슴을 쥐어뜯던 회한의 시간들을 목숨하고는 바꿀 수 없는 거냐고 수없이 반문하고 반문했던 하루하루, 불면 속의 악몽과 밤마다 내리는 장중한 빗소리의 힐문과 두려움, 돌아오지 않는 날의 번뇌를 다 사면받을 수는 없겠다 이 여행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기를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가혹한 봄날 - 김윤배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겨울부터였다 마주 앉은 짧은 순간의 일이었..

한줄 詩 2021.04.10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 최세라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 최세라 소외에도 순서가 있었다 장애인 먼저, 그리고 노인과 병자 나는 죽어서 장례식장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질투했다 짐짝을 밀며 절뚝절쭉 화물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메마른 뺨 같은 흙부스러기를 껴안고 문장 속을 내달리는 잡초의 군락지들 곳곳에 있었다 계절도 타지 않았다 생육조건이 같다는 이유로 잡초의 군단을 이루고 있는 나도 아버지 당신도 잡초였습니까 이따금 서광꽃 노을 빛이 물속으로 흘러들었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귤빛이 조금 옷게 만든다지만 이유없이 절실해지는 날은 내가 내 인생의 악역 배우라는 생각 그래서 어쩌면 물 속에 들어앉아 천장이거나 바닥이거나 몸을 빈틈없이 두르는 벽이거나 자루인 흐린 물 속에 들어앉아 당신을 잃었을 때 들려 오던 약한 맥박을 한 번만 다..

한줄 詩 2021.04.10

불편으로 - 이규리

불편으로 - 이규리 ​ 불빛을 좀 낮춰주세요 내가 아프니 그들이 친절해졌는데요 그러지 말아요 아픔을 가져가지 말아요 만나는 사람들 저마다 상처받았다 받았다 하니 상처가 사탕인가 해요 태생들은 불편이었을까요 불편을 들이며 그만한 친구도 없다 생각했는데 이게 그거 별일 아니라는 듯 별이라 불러보려 했는데 그 별 다치게 한다면 멀게 한다면 일찍 늙어버린 사람 마치 그러기를 바란 사람처럼 별과 별 사이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다고 그랬을까요 손톱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한 생각을 물어뜯도록 괜찮아요 절룩이며 여기 남을게요 불편이 당신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끌 수 있다면 별을 헤듯 그래요 여기 남아서 말이죠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역류성 식도염 - 이규리 뭔가 하면 할수록 비천해갔다 밤의 이야기들..

한줄 詩 2021.04.09

금요일은 분홍이다 - 이강산

금요일은 분홍이다 - 이강산 한나절 마늘 꼭지를 따고 깜박, 사람을 못 알아보는 동춘요양원 601호실 정옥연 씨에게 바나나를 까주고 한나절은 옥천산방 꽃밭에서 홀로 지내고 바나나 껍질처럼 물러터지다가 쥐똥나무 열매처럼 까맣게 오므라들다가 이젠 죽음 말고 아무 할 일도 없는 정옥연 씨처럼 휘청휘청 삼청저수지 둑길을 걷다가 어제의 직진은 버리고 우회하다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불현듯 나의 좌표가 궁금해져 삼청제(三淸堤)라 하려다가 가로등 1-546, 하려다가 어젯밤 삐끼 노파 모르게 사진 찍은 수도여인숙으로 하려다가 산방 아래 외딴집 복숭아꽃으로 한다 맨발로 달려드는 분홍으로 한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목련 주사(酒邪) - 이강산 반나절 봄비 마신 목련의 치아가 하얗다 입술 틈새 봄 ..

한줄 詩 2021.04.09

언어물리학개론 - 박인식

언어물리학개론 - 박인식 -꽃과 단풍 꽃은 필 때 단풍은 질 때가 절정의 말 꽃이 피고 단풍이 지는 동안 당신과 내가 머물던 말의 자리들 다시 꽃이 피고 또 다시 단풍 질 말의 절정에서 꽃말은 밝은 아침문을 열면서 당신도 열어 나를 말하는 중 단풍말은 투명한 저녁창을 닫으며 나도 닫아 당신을 듣는 중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언어물리학개론 - 박인식 -고도는 어제 온다 해놓고 어제 오지 않았다 오늘 온다더니 오늘도 오지 않는다 내일은 온다지만 내일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작도 끝도 기다림뿐인 고도는 누구인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이가 고도의 정체를 고도의 아버지에게 물었었지 -나도 모른다 알고 있다면 이미 썼겠지 사무엘 베케트의 언어물리학이 창작한 고도는 인간의 ..

한줄 詩 2021.04.09

종점 - 김유석

종점 - 김유석 오래된 벽화처럼, 담벼락에 두 사람의 노인네가 몸을 말고 붙어 있다. 서캐 같은 춘삼월 볕에 그림자가 이따금 꿈틀, 무릎에 묻힌 몸이 풀무치 잔해 같다. 같은 시각 같은 곳을 도는 읍내버스 내리고 타는 이 없어도 슬며시 문을 한 번 여닫고 돌아나갈 때 담장에 나란히 기대어 놓은 지팡이 하나가 스르르 눕는다. 살구꽃이파리 으슬으슬 가지를 털고 들고양이 울음이 소름을 한차례 돋쳤을 뿐, 떠난 몸에 묻어 있는 볕뉘 긁어모아 남은 이의 적막을 염하는 석양이 힐끗, 다음 배차 시간표를 들여다본다.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도서출판 상상인 처서 - 김유석 혼자 살다 가는 이의 유품 같은 날이었다. 지난다는 말, 물러간다는 기별 다시 오지 못한다는 뜻으로 울음보다 긴 적요를 끌고 다음 생을 건..

한줄 詩 2021.04.08

기어코 그녀 - 정이경

기어코 그녀 - 정이경 -우물가 자목련 한 그루 대문 밖으로 맴돌던 아버지 비문증이 있었고 이명이 심했다 스스로 유적이 되거나 유폐를 원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하게 아버지의 난시를 물려받았고 왼손잡이를 이어 가진 길고 긴 겨울 우듬지에 내걸린 나는 분명 다른 이름의 새였다 문고리가 담긴 액자 속에서 문지르고 문질러도 어김없이 제 몸과 이별하는 꽃만 가득했으므로 생의 한쪽 모퉁이가 나간 대문의 경첩 삭아 헐거워지도록 꽃을 피우고 잎을 피워내던 자목련 아래의 마당이 느릿느릿 일어나자 어떤 통곡을 감춘 검은 그루터기가 생겨났다 잠시 다녀간 햇빛들의 간격 사이로 발볼이 좁은 발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난, 엄마가 엄마를 베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 많은 눈은 언제 어느 우물에 눈 맞추고 있을까 *시집/ ..

한줄 詩 2021.04.08

제1구역 재개발 골목 - 이철경

제1구역 재개발 골목 - 이철경 온기마저 잃은 쪽방 모퉁이에도 목련은 피고 지는데 독거의 아랫목은 식은 지 오래 혈기왕성했던 꽃들과 달리, 하나둘씩 생을 놓는 저 거친 삶의 종착지 고독했던 사람은 더 고독해지고 눈물지던 사람 더 큰 슬픔에 흐느끼는 인적 끊긴 봄밤의 절규가 골목마다 아우성이다 저 힘없이 고개 떨구던 꽃들은 참회의 눈물로 누군가는 서럽게 울다가 생을 놓는 일이 허다하다 제각기 변명을 바람 앞에 늘어놓으며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만, 처음 버려진 골목을 떠나지 못하는 유기견처럼 목련꽃 난자한 바닥에 깨진 달빛마저 처절하다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한정판 인생 - 이철경 국가나 조직에서 입력된 명령에 따라 새벽이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지요 저녁이면 퇴근길 한잔의 술도 할 수 있는 ..

한줄 詩 2021.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