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총상화서 - 류성훈

총상화서 - 류성훈 봄은 한 번도 봄에 이른 적 없고 너무 가벼워 담장 어디에서도 주울 수 없는 발소리가 땡볕 아래의 줄기들을 깨운다 용서 같은 건 받는 쪽보다 하는 쪽이 나을 줄 알았어, 네가 아침을 그렇게 닮은 줄 몰랐던 나는 주전부리 하나 없는 저녁만 닮아 갔다 나무도 링거를 맞는 세상이네 그런 소리나 하면서 기약 없는 인사를 늘려 가면서 우리는 더 가벼운 곳으로 꽃잎들이 다시 하늘로 졸도한 온도계 눈금을 손금처럼 펴 보이는 네겐 모든 상처들만 유채색이었다 밀과 보리가 자라듯 우리는 무한히 자랄 줄 알았지 다르게 자란 건 죄야, 나는 너를 탓하고 너는 봄을 탓하며 젖은 잎을 주웠다 웃으면서, 웃으면서 끼워 놓은 책은 다시 펴지 말자 아무리 걸어도 마주치지 않을 계절 앞 봄,이라는 말은 더 근질근질했..

한줄 詩 2021.04.19

없는 것보다 못한 - 여태천

없는 것보다 못한 - 여태천 어둠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나둘씩 카드를 접기 시작했다. 마감뉴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재수 없다. 메시지는 저 멀리서 온다. 간절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상황은 언제나 최악이다. 한 사람은 이제 걷기 시작했지만 한 사람은 지금 막 주저앉는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누군가를 울게 하는 언제나 몸은 피가 모자라고 그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만질 수 있는 따뜻한 손이 아니었다. 너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슬픔은 자란다 - 여태천 잘 자라지 않았다. 당신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나이스했지만 아침 일찍 벌레를 잡는다는 새 이야기는 좋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당신이 기억하고..

한줄 詩 2021.04.16

봄날 수리점 - 안채영

봄날 수리점 - 안채영 물 담긴 고무 대야에 자전거 튜브를 넣자 자잘한 공기의 씨앗이 흘러나온다 날카로운 못 하나가 뚫어놓은 곳으로 파종되는 봄날의 공기들 바람이 새는 곳을 찾아 접착제 묻은 햇살 하나 붙여두면 다시 굴러갈 둥근 바퀴들 문득, 잠깐 멈추었던 지구가 다시 도는 듯 차르르 체인 도는 소리가 들리고 수리가 끝난 바람의 핸들을 잡고 짧은 봄날이 간다 날카로운 못 하나를 줍고 싶다 부푸는 벚꽃나무를 찔러 바람 빼면 우수수 날리며 쏟아져 날릴 흰 꽃잎들 달력을 찌르면, 생일을 찌르면 다 빠져나가고 남을 숫자 없는 생 바쁜 봄바람이 잠시 서 있고 흰 머리카락 한 올 같은 깊은 실금을 내고 있는 봄 고장 난 봄바람 몇 대 세워놓고 고무 대야에 물 담아놓고 있는 자전거 수리점 바람 빠진 몇 번의 봄을 끌..

한줄 詩 2021.04.16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 박윤우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 박윤우 우리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묵은 이명씨(耳鳴氏)가 산다 오늘따라 내가 흔하다 나는 계단참이고 우산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풍경이다 우스운 일에만 웃는다 인적 드문 내소삿길, 인중 긴 꽃을 내려다보며 눈으로 만졌다 무슨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꽃 풀 먹인 모시적삼 깃동 같은 녀석에게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다 거기, 매발톱 꽃은 폭발이 아니라 함몰이다 사월의 허리를 부축하는 미나리아재빗과 누두채(漏斗菜) 대궁 위의 푸른 뿔, 안으로 안으로 구부리는 푸른 화판 끼리끼리 붐비며 함몰 중이다 잎도 안 난 노루귀가 매발톱 따라 고개를 꺾는, 매발톱과 노루귀 사이 너를 묻으며 비를 맞았다 돌아와, 식은 밥에 물 말아먹고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지우는데, 이명씨(耳鳴..

한줄 詩 2021.04.15

엄마의 태양계 - 피재현

엄마의 태양계 - 피재현 엄마 방에는 여섯 명의 환자들이 있다 여섯 명의 평균연령은 대략 88세쯤 팔십하나 엄마가 평균을 많이 깎아먹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고 했으니 엄마의 요양원은 소멸해 가는 별들의 태양계 늙은 별들이 사라지고 샛별 대신 다른 은하계 낡은 별들의 이주로 채워지는 유배의 태양계 이 태양계는 유난히 유성이 많아 남은 별들은 궤도를 이탈해 떠나간 어제의 유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러는 유성이 되고 싶어도 하고 엄마는 아직도 외계의 존재를 믿으며 밤마다 우주복을 깁는다 엄마가 꿈꾸는 외계는 깨꽃이 피고 냉이가 지천이며 하루 들에 나가 일을 하면 오만 원을 주는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이다 나는 그 외계에서 우주선을 타고 엄마를 만나러 부실한 태양계에 자주 진입하지만 내 우주선은 일 인승이라 ..

한줄 詩 2021.04.15

그녀가 두고 간 쪽지 - 김보일

그녀가 두고 간 쪽지 - 김보일 잠든 남자의 머리맡에 새 신 하나를 놓아 주고 여자는 일력의 뒷면에 쪽지를 쓴다 참개구리가 울고 살구꽃이 피고 물양귀비의 가랑이 사이로 물고기들이 숨고 아픈 나무의 발목에도 새들이 지저귈 거에요 바람이 울고 간 자리마다 못 보던 풀들이 돋아나면 당신은 이마 위에 얹힌 물수건을 걷고 어느 낯선 동리의 나무 아래를 지나가며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구름에 적어 보내실 테죠 햇살이 아침의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시간 목련나무 아래 그녀가 써 놓고 간 문장이 가득하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보길도의 밤 - 김보일 달빛이 붉은가시나무와 쥐똥나무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밤, 여인숙 이부자리에서 길 잃은 터럭 하나를 주웠다 노련한 사냥꾼은 잠자리만 보아도 어떤 동물이 묵고 갔는지, ..

한줄 詩 2021.04.15

연분홍 유언이 있었다 - 천수호

연분홍 유언이 있었다 - 천수호 노래만 남기고 꽃잎은 가져간 사람이 있다 투병은 길었다 만개하기 전에 꽃잎이 먼저 부스러져서 그는 잘 보지 않는 책갈피를 열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핏기도 핏물도 없는 페이지에 잘 찍은 발자국처럼 꽃잎 가랑이를 찢어도 보았구나 그래, 당신이었어! 언젠가 그를 그렇게 열어볼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그는 더 먼 곳에 있겠다고 했으니 꽃잎은 병색도 모르고 그를 따라갔고 물기가 빠져나간 페이지에 이야기들만 남아 개미처럼 기어다니겠지 한 페이지 넘기고 듣고 한 페이지 넘기며 따라 부르고 그런 사랑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납작해진 꽃잎을 간혹 건드려 깨워야지 딱풀처럼 잘 붙은 사랑 얘기는 다시 열지 말까? 오래 덮어둔 책이 있는지도 모르는 날이 올 테니까 꽃잎만 남기..

한줄 詩 2021.04.12

하지만 그러므로 - 김희준

하지만 그러므로 - 김희준 망가진다 단지 읽어낼 수 있는 건 문양뿐이다 삐걱거리는 순간 방의 조직이 괴사한다 열어둔 통조림에서 이국의 햇빛이 쏟아진다 알루미늄 뚜껑에 생이 베인다 달콤한 피가 고인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 환풍기로 잘리는 바람이 물컹하다 높아지는 천장에서 뭘 하면 좋을까 잘린 바람이 머릿속을 헤맨다 몇 구의 사체가 곁에 눕는다 단물을 뱉자 햇빛이 목에 걸린다 동굴은 퍼지는 것을 오래 잡아둔다 이국의 태양과 절름거리는 바람이 다음 세기까지 머무를 것이다 파인애플 진액이 팔꿈치로 흐른다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나를 저미는 순간 태양이 몸을 푼다 밀고와 열고의 차이를 안다면 동굴을 빠져나오는 거야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

한줄 詩 2021.04.12

꽃의 장난 - 손음

꽃의 장난 - 손음 꽃은 나뭇가지에 앉아 간들간들 논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간들간들 논다 바람과 햇볕이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격렬하게 꽃과 놀다 헤어지는 일 꽃은 사내처럼 가는 것이고 사내처럼 오는 것이다 나는 여배우처럼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흥청망청 꽃을 운다 꽃나무 아래 서서 지나가는 세월을 구경한다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이름이 통증을 만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졌을 때 이별을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 잔인해졌다 이별은 허술한 요리사가 만드는 싸구려 음식 같은 것 오늘은 봄이고 나는 꽃을 만나러 간다 꽃을 헤어지러 간다 울면서도 가고 자빠지면서도 간다 내가 어쩌다 걱정한 꽃이 우리가 어쩌다 미워한 꽃이 그곳에 산다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가 ..

한줄 詩 2021.04.11

성층권의 황혼 - 허진석

성층권의 황혼 - 허진석 인천에서 이륙해서 석양을 맞으면 태양계의 행성들이 반대편 창에 줄을 선다. 한 겁에 딱 한 번 일렬로 서서 모세의 바닷길처럼 바짝 마른 길을 낸다. 명왕성까지 간다. 오후 일곱 시 발 에어버스, 흑인 승무원이 적포도주를 따라주는 복도 끝 캄캄한 저곳에서 선명한 그림자 속에서 내려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고 누군가 고함을 친다. 아버지다, 어머니다, 명왕성이다. 가장 먼 그곳에 가 보지는 못했어도 본 사람은 있다. 새벽별 눈에 담은 싯다르타나 저 아래 중앙아시아의 산맥 위를 나는 독수리 얼음과 붉은 대지와 콸콸 흐르는 강산强酸의 하천을 노래한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곳에 살아 나 모르게 죄를 지었다면 인연의 새 사슬을 끌며 아들과 딸과 미처 보지 못한 기억마저 기다리리라. 젊은..

한줄 詩 202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