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애도의 이유 - 백인덕

마루안 2021. 4. 6. 19:41

 

 

애도의 이유 - 백인덕


안경을 닦으며 걷는다
맹목의 순간이 느리게 이어지다
간혹 뚜렷해지는 사물들,
붉게 우는 우체통을 지나면
마주칠 때마다 건빵을 건네주는 선지자가 있다

길에는 늘 구원이 있고
제멋대로 흐르는 죽음도 있고
그러나 길은 어디로도 닿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가슴 높이 부지런히 양손을 움직여 안경을 닦는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을 너무 많이 본
안 봐도 되는 것을 열심히 본
마땅히 봤어야 할 것을 안 본
나와 시대와 세계와 우주

아이가 흘린 과자를 쥐고 순식간에
나무 위로 올라가는 다람쥐

제 그림자에
환한 모자 하나 씌워주지 못한 불기(不起)의 게으름이
오돌오돌 발밑에서 솟아오르는
여기-지금

불멸(不滅)이라니,
아무 겨냥도 없는 종소리
살 틈을 파고든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이기적인 기도 - 백인덕


누구 보라고 피는 꽃일망정
최소한 나는 아닐 것이다

딴 데 보고 우는 새
새를 지켜보며
하염없이 새는 생각

아침의 노란 꽃은
대낮에 희고 저녁에 붉다
이 한밤 기억 속에서는
서글프게 잔혹하다

불빛을 향해 우는 고양이
깊숙이 귀를 열어도 틈이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몰래 일어나는 비극이라도
최소한 나는 아닐 것이다
나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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