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었다 - 김태완

마루안 2021. 4. 6. 19:31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었다 - 김태완


오래 전 읽었던 책의 접힌 부분을 편다

발효된 향기로 다가오는
눅눅한 시간
곱게 접었던 자리를 펴자
우수수 쏟아지는 그리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접어두었던 걸까

늘 소리내어 읽지 않았다
묵음으로 낭독되어 쌓여진 의미들이
내 몸으로 들어와 늘 접혀진다

너를 읽는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어느 줄거리에서 끊어진 맥락이 울고 있거나
편안한 저녁은 며칠이 지나 찾아왔다.

너의 쓸쓸한 문장이 나를 찾을까
오래 전 다짐한 약속처럼
눈물 머금은 너를 다독이며
한 장의 아픔을 넘긴다
접힌 흔적이 묵음의 무게에 천천히 소멸될 즈음

비로소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 되었다.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싱겁다 - 김태완


예상했던 대로 가는 건 싱겁다
끝이 생각했던 대로 끝이 되는 건 싱겁다

당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끝까지 마지막 투병의 길을 거부한 아버지는
가야 할 때를 알고 회한의 눈물로 이승의 말을 대신했다
마지막이라는 막막한 단절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수긍되는
자연스러운 이별이 아니던가.

세상의 아버지는 전생에 일개미이거나
답답한 늘보였거나 묵묵히 밭을 갈던 황소였을까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시래깃국 맛을 알게 된 어느 날
그 맛이 이 맛이었구나, 된장 풀린 흙빛 마른 시래기
입안에서 짭조름한데, 분명 짭조름한데

싱겁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기억은 또렷할 줄 알았는데, 싱겁다
우리는 싱거운 한때의 계절을 보내는
누군가의 아들, 어느 집 딸들의 아버지
예상했던 대로 끝이 되는 범상한 길
우리는 모두 싱겁다. 싱거운 바람이
아버지 봉분 같은 내 뒤통수를 쓰다듬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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