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의 경계에서 - 조하은
가장 뾰족한 시간을 넘었다 생각했는데
시간은 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무처럼 몸에 새기는 것이었는지도
새순이 올라올 때의 그 간지러운 설렘이
몸을 적실 때에도
엇나간 박자가 삶을 두들겨댈 때에도
당신과의 추억은
나를 숨 쉬게 하는 마술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과
가장 빠른 시간이 만나는 지점에
오늘은 서 있다
어쩌면 세상은
두 눈 감을 때 품고 갈 마지막 이름과
지우고 싶은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사이의 전쟁
천사의 날개와 반월도를 들고
시간의 신을 베고 싶은 오늘
시간의 속도는 가차 없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비문증 - 조하은
눈에 파리가 날아다녀요
작은 날파리부터 온갖 날개 달린 것들이
날아다닐 겁니다
의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딱히 약은 없습니다
너무 많이 보려고 하지 마세요
시력은 점점 떨어질 겁니다
문 닫는 눈물 공장을 지나
막막한 망막을 지나
수없이 많은 날갯짓으로 다가오는 늦은 오후
빛과 어둠의 변주곡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물결처럼 번지는 눈부심의 뒤편에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돋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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