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간의 경계에서 - 조하은

마루안 2021. 4. 2. 21:21

 

 

기간의 경계에서 - 조하은


가장 뾰족한 시간을 넘었다 생각했는데
시간은 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무처럼 몸에 새기는 것이었는지도

새순이 올라올 때의 그 간지러운 설렘이
몸을 적실 때에도
엇나간 박자가 삶을 두들겨댈 때에도
당신과의 추억은
나를 숨 쉬게 하는 마술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과
가장 빠른 시간이 만나는 지점에
오늘은 서 있다

어쩌면 세상은
두 눈 감을 때 품고 갈 마지막 이름과
지우고 싶은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사이의 전쟁

천사의 날개와 반월도를 들고
시간의 신을 베고 싶은 오늘

시간의 속도는 가차 없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비문증 - 조하은


눈에 파리가 날아다녀요

작은 날파리부터 온갖 날개 달린 것들이

날아다닐 겁니다

의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딱히 약은 없습니다

너무 많이 보려고 하지 마세요

시력은 점점 떨어질 겁니다

문 닫는 눈물 공장을 지나

막막한 망막을 지나

수없이 많은 날갯짓으로 다가오는 늦은 오후

빛과 어둠의 변주곡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물결처럼 번지는 눈부심의 뒤편에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돋아나고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추밭 - 황형철  (0) 2021.04.03
먼지의 무게 - 이산하  (0) 2021.04.03
그믐달 - 심명수  (0) 2021.04.02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 이원하  (0) 2021.04.02
섬진강이 궁금하다 - 이운진  (0) 202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