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감자꽃 필 무렵 - 허림

감자꽃 필 무렵 - 허림 언제든 떠날 애인이었다 집은 자주 비었고 방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개들이 짖는 게 낯설지 않았고 괭이들이 뒤돌아보며 뒤란에 몸을 숨겼다 내 모르는 소문이 떠돌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그믐밤도 길은 환했다 애인이 떠난 저녁이었다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삭망 - 허림 갈 길이 쇠털같이 많다고 했지만 꽃들은 지금 한창 장터에서 만난 몇몇은 다음에 밥이나 먹자고 했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아리랑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순대에 딸려 나온 허파와 혓바닥 염통 오소리감투 오늘이 지나간 날들이 달력에서 희미해지고 오는 금요일이 며칠이니 무슨 요일이니 물었을 뿐 아무도 지나간 시간이 언제 오냐고 묻지 않았다 설사 꿈이 찾아왔어도 '참 시안타 무슨 일이지' ..

한줄 詩 2021.04.23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음해 몰라서 죄가 되기도 한다 한결같이, 네가 내게 보내 준 달콤한 혀에서는 말랑말랑한 웃음이 계속 터져 나오고 어쩌나, 꽝꽝 얼어붙은 표정을 포장한 너는 수시로 뒤틀리다 습관이 된 줄을 몰랐다 숨기는 건 습관성 다람쥐가 땅속에 수없이 많은 알밤을 묻어 놓고 찾지 못하는 것처럼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도처에 가능성은 허다해진다 싹이 될지 함정이 될지 아무도 모른 채 지층 아래 마그마가 끓어 오르는 자리는 충혈된 가시들을 단련시키기 좋은 포인트 억울한 심정에는 특화된 자리 천사처럼 너는 웃었는데 웃음은 공갈빵처럼 부풀었는데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를 그 웃음 뒤에서 덮어 버리기엔 손이 너무 시리고 돌아서 버리기엔 등이 너무 허전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죄인이 된다 *시집/ 나는 어제..

한줄 詩 2021.04.23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 전인식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늙는다 - 전인식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꽃이 필 때와 질 때 불과 며칠 사이 나는 일 년 치를 한꺼번에 늙는다 피와 살이 강물처럼 빠져나가고 어디론가 뒤따라간 마음 또한 돌아오지 않는 들불이 지나간 듯 허허로운 가슴 기슭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발이 날리며 한순간 사계절이 일순할 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일도 하늘 날아오를 듯 날개짓하는 열망과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 같은 체념도 다 이맘때 일어나는 일 뜨겁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불과 며칠 사이 나는 늙는다 선명한 나이테 무늬를 그리며 단박에 늙는다 이를테면, 나는 돈오돈수로 늙는다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뱀, ..

한줄 詩 2021.04.22

수면유도제 - 전영관

수면유도제 - 전영관 신의 안검이 덮이듯 밤이 오면 신문 부고란에 투고하고 싶어진다 한파를 건너오느라 발 시린 슬픔만 과장된 바람에게 신을 신겨주고 싶다 폐지 할머니의 리어카를 보험이 필요 없는 나라로 밀어주고 싶다 등 돌리는 길고양이에게 사람을 버리듯 내게서 떠나는 몸짓이냐고 묻고 싶다 자동문보다 눈치 빠르게 벽만큼 신중하게 고민한 후에 애인보다 가까운데 실속 없는 편의점에서 부모처럼 수고롭고 멀지만 다 갖춘 마트로 개종하고 싶다 책마다 그득한 밑줄들을 낙서라고 지워버렸다 이전의 호감들은 오해였다고 끄덕였다 내 문장은 비문이라 낙담하면서 절창의 제국에 난민 신청 하고 싶다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초월을 터득하고 싶다 건강할 때는 사소하다 흘려버렸던 사소한 것들의 목록을 되찾고 싶다 내 앞에서 먼저 죽는 참..

한줄 詩 2021.04.22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 이규리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 이규리 물이 줄줄 흐르는 은하탕 벽엔 애써 붙인 주의들이 다 떨어졌다 우리가 결국 무얼 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애써 닿지 않으려 거리를 유지하지만 서로 보이지 않으려다 보게 되는 것 돌아나가다 부딪게 되는 것 다 벗고도 우리 단순해지지 않는다 냉정과 열정 그리고 흘러넘치는 손과 발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물가엔 얼룩말과 낙타 끝없고 덧없다 퇴장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경기처럼 저마다의 사막이자 고원에서 짧은 순간에도 상대의 슬픈 이력을 엿보아야 했다면 물이 줄줄 흐르는 수평도 절벽이 되는 난간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거즈의 방식 - 이규리 진물이 말라붙은 거즈를 보면 그들은 어느새 한몸이 되어 있다 굳이..

한줄 詩 2021.04.22

간고등어 - 손석호

간고등어 - 손석호 오른손이 의수인 그는 어선을 탔었다고 했다 노을이 도마 위 핏물을 벌겋게 덧칠하자 무쇠 칼이 고등어 배를 가르던 왼손을 놓아주었다 목장갑에 달라붙은 왕소금을 털어 낼 때 화구 밖으로 거세게 역류하는 화염 파르르 얼굴에서 출렁이는 난바다 석쇠를 뒤집는 팔뚝 근육이 로프처럼 팽팽하게 솟았다 한 번도 눈감지 않은 고등어의 눈알과 마주쳤을 때 연기 때문에 맵다며 갱빈으로 걸어 나갔다 내성천이 바다로 가는 물길을 보여 주자 꾹 깨문 입술 쪽으로 왕소금처럼 왈칵 뿌려지는 눈물 억새 무리 어둡도록 파도가 되어 주고 버들가지가 뺨을 훑어 주는 동안 강물이 이유를 묻지 않고 따라왔다 배를 가른 고등어의 안쪽 등뼈 같은 억새밭 샛길을 가로질러 돌아오며 눈가에 핀 소금꽃 털어 냈다 골바람도 나와 앉은 툇..

한줄 詩 2021.04.21

찢어진 고무신 - 이산하

찢어진 고무신 - 이산하 감옥의 독방에 살 때 내 옆방에 젊은 사형수가 들어왔다. 세상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는 한겨울에도 사각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혼자 운동장을 달렸다. 우리는 서로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가끔 통방을 했다. "오늘은 몇 바퀴 뛰었어요?" "어제보다 한 바퀴 덜 뛰었어요." 대답은 늘 똑같았다. 그게 몇 바퀴인지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덜 뛰는' 날이 없을 때가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짐작만 했다. 멀리 구치소 담장 위로 낙엽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느날 아침이었다. 평소 수런거리던 복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유난히 큰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가 옆방에 멈췄다. "수번 5046번 접견!" "오늘 면회 올..

한줄 詩 2021.04.21

더 이상 운세를 보지 않기로 하였다 - 백애송

더 이상 운세를 보지 않기로 하였다 - 백애송 달력 틈새에 끼여 있던 날 많은 날과 날들에게는 짠맛이 났다 눈을 뜨면 운세를 검색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하루 오늘 해야 하는 것보다 오늘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더 집중하던 날 피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은 늘 어긋났고 누군가는 내 말에 정중한 매듭을 지어 버렸다 사용하지 않은 삶의 근육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방관되었다 오늘은 무사히 벽에 박힌 하루를 빼낼 수 있을까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걷는사람 별책부록 - 백애송 중요한 순간은 미끄러져 지나간다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다 손등에 남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그곳은 허방이었다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기대는 서로의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뜸만 들..

한줄 詩 2021.04.20

너무 상투적인 삼청동 - 홍지호

너무 상투적인 삼청동 - 홍지호 사랑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다짐들 헤어지지 않고는 적을 수 없는 예언과 미치지 않고서야 미칠 수 있었겠는가 견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희망이라는 생각 거품처럼 거품같이 겨울처럼 겨울같이 걷다보면 걷게 된다 예언 속을 생각하다보면 생각의 끝에 도착할까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삼청동 길을 걷다가 문득 여기에 살고 싶다 살 수 없겠지 말했을 때 말에는 힘이 있다 살 수 있다 말해보라고 말해준 사람은 너였지 귀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 도와준다고 한 사람은 너였지 삼청동에 살고 싶다 삼청동에 살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말하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 말해준 사람은 너였는데 나는 삼청동에 살고 있다 지금은 어디서든 삼청동에 살고 있다 ​ *시집/ 사람이..

한줄 詩 2021.04.20

꽃이 운다면 - 손남숙

꽃이 운다면 - 손남숙 어느 집 슬레이트 지붕 골짜기로 흘러 내려오는 붉음 같겠지 박태기는 선명한 분홍색을 핏물처럼 빼내는 중이었어 빈집 꼭대기 위로 올라가 하염없이 머나먼 길을 돌아온 어느 자식의 긴 밤을 같이 보내려던 것이었지 마침 곁에는 밤새 엿듣는 나무가 있었어 벚나무는 우연히 흘러 들어온 방랑객처럼 그 집 마당 구석에 서 있었지 뭔가 운명처럼 서로를 맞대 보는 날도 있는 거지 봄날에 먼저 쏟아지는 건 벚꽃이야 흩날리며 제 울음을 바삭하게 말려 보내면 옆에서 가만히 들어 주던 박태기가 별안간 깜짝 놀랄 분홍색을 만들어 슬그머니 금이 간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꽃들의 눈물이 배어 들어가 눈물은 천장을 타고 무너져 가는 서까래 밑으로 떨어지겠지 삐걱거리던 마루는 다 뜯겨 나가고 없어 꽃잎들이 낱낱이 듣..

한줄 詩 2021.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