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 이규리

마루안 2021. 4. 22. 21:42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 이규리

 

 

물이 줄줄 흐르는 은하탕 벽엔

애써 붙인 주의들이 다 떨어졌다

 

우리가 결국 무얼 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애써 닿지 않으려 거리를 유지하지만

 

서로 보이지 않으려다 보게 되는 것

돌아나가다 부딪게 되는 것

 

다 벗고도 우리 단순해지지 않는다

 

냉정과 열정 그리고 흘러넘치는 손과 발

 

입구와 출구에서 생이 서로 마주쳤을 때

 

물가엔 얼룩말과 낙타

끝없고 덧없다

 

퇴장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경기처럼

저마다의 사막이자 고원에서

짧은 순간에도

상대의 슬픈 이력을 엿보아야 했다면

 

물이 줄줄 흐르는

수평도 절벽이 되는 난간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거즈의 방식 - 이규리

 

 

진물이 말라붙은 거즈를 보면

그들은 어느새 한몸이 되어 있다

 

굳이 누가 원했다 하기에도 좀 애매하다

그렇게 말도 없이 애를 낳고 살림을 차리고

 

시간이 지나면

의미는 쏙 빠지고 이야기만 남지 않을까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데려와 생각날 때마다 흔드는 이들은

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행한 상처만 기억하니까

불행할수록 기억이 많아지니까

 

마데카솔 광고는 처음처럼 돌아온다 돌아온다는데

누구라 처음을 알까

 

고쳐 앉으며 돌아누우며 비루한 지상의

상처를 믿어보는 것

 

영리한 사람은 기억하고 선량한 사람은 이해하겠지

물집이었던 시간에

칸칸 세 들어

 

우린 이전을

이미 살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

나는 잠깐씩 죽는다

눈뜨지 못하리라는 것
눈뜨지 않으리라는 것
어떤 선의도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
불확실만이 나를 지배하리라

죽음 안에도 꽃이 피고 당신은 피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