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무 상투적인 삼청동 - 홍지호

마루안 2021. 4. 20. 21:36

 

 

너무 상투적인 삼청동 - 홍지호


사랑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다짐들
헤어지지 않고는 적을 수 없는 예언과

미치지 않고서야
미칠 수 있었겠는가

견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희망이라는 생각

거품처럼 거품같이
겨울처럼 겨울같이

걷다보면 걷게 된다 예언 속을

생각하다보면
생각의 끝에 도착할까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삼청동 길을 걷다가 문득
여기에 살고 싶다 살 수 없겠지
말했을 때

말에는 힘이 있다
살 수 있다 말해보라고
말해준 사람은 너였지

귀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 도와준다고 한 사람은 너였지

삼청동에 살고 싶다 삼청동에 살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말하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
말해준 사람은 너였는데
나는 삼청동에 살고 있다

지금은 어디서든 삼청동에 살고 있다


*시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문학동네

 

 

 

 

 

 

일요일 - 홍지호


버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버리기 위해 쓴다
쓰게 되면 버릴 것들이 생기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는 사랑해서 너를 썼나
너를 쓰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에게는 언제나 순서가 문제였지만
순서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오늘의 안식은 어제의 기념
계절은 바뀔 것이나
기념은 계속될 것이다
어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날이므로
어제를 쓰기 위해
오늘은 계속 버려질 것이므로

사랑의 창조자여
네가 일요일과 월요일 중 어느 쪽이 한 주의 시작인가에 대해 골몰할 때
오늘은 지나가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 것처럼
오늘이 온다

가끔 너는
버리기 위해 너를 썼냐고 물을 수 있다
그건 내가 너를 쓴 의도와 다른 것이지만
너는 그럴 수 있고
너는 물을 수 있지만 나는
대답해줄 수 없다

나를 창조한 나의 피조물이여
나의 사랑하는 비문이여
너를 내가 썼다

내가 너를 썼다고 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 사랑하는 자여
문장에는
순서보다 중요하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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