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마루안 2021. 4. 23. 21:52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음해

 

 

몰라서 죄가 되기도 한다

 

한결같이, 네가 내게 보내 준 달콤한 혀에서는 말랑말랑한 웃음이 계속 터져 나오고 어쩌나, 꽝꽝 얼어붙은 표정을 포장한 너는 수시로 뒤틀리다 습관이 된 줄을 몰랐다 숨기는 건 습관성 다람쥐가 땅속에 수없이 많은 알밤을 묻어 놓고 찾지 못하는 것처럼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도처에 가능성은 허다해진다 싹이 될지 함정이 될지 아무도 모른 채 지층 아래 마그마가 끓어 오르는 자리는 충혈된 가시들을 단련시키기 좋은 포인트 억울한 심정에는 특화된 자리

 

천사처럼 너는 웃었는데 웃음은 공갈빵처럼 부풀었는데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를 그 웃음 뒤에서 덮어 버리기엔 손이 너무 시리고 돌아서 버리기엔 등이 너무 허전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죄인이 된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살아 있는, 유령들 - 이기영

-재계약의 날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하루를 아무렇지 않게 건너간다 딱딱하게 굳으면서 굳게 견디면서 눅눅하던 때의 곰팡내마저 그리워하면서 대낮인데도 휘청거리는 낮술을 탁 탁 털어 넣으면서 산뜻하게 건조하게 자꾸 고여 있는 무언가를 증오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주술에 의지해서라도 영원히 밤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진통제의 날들을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하루를 제물로 바친다 뜬눈으로 지새면서 두리번거리면서 잠 못 들면서 자꾸 기대하면서 잠과 그 밖의 기타 등등의 것들을 추종하는 세력에게 쓸모없이 맞서면서 쓸모 있게 빌붙으면서

 

눈 딱 감고 적응 혹은 저항에 나를 의탁한다

 

 

 

 

*시인의 말

 

나는 원한 적 없는데

지금, 여기에 있다

원한 적 없어서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

원하는 게 많아서

견뎌야 하는 날들로 넘쳐난다

거창하지 않아도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좋은 날들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