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어둠의 원본 - 김대호

어둠의 원본 - 김대호 어둠이 빛나는 한낮을 지나 어둠의 원본이 드러나는 밤이 온다 한낮에는 온갖 빛나는 것들 때문에 어둠이 훼손되었다 그 훼손된 한낮에 더듬거리며 일을 하고 더듬거리며 당신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당신의 눈빛은 밤과 잘 어울린다 밤에 만나는 당신의 허연 목덜미는 참 매혹적이다 나는 당신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한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당신은 빛에 찢어진 목청을 보수하느라고 가글을 한다 모든 영업이 끝난 이 밤에 밤의 속살을 얻기 위해 고요한 영업을 시작한다 아무것도 빛나지 않기에 당신의 음영이 뚜렷하다 사람이여 사랑이여 이 밤이 나의 최초라는 것을 이 밤이 나의 우화라는 것을 통속적인 것을 지나 아주 진지한 통속의 새벽을 기다리고 있음을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한줄 詩 2021.04.30

대못이 박힌 자리 - 곽재구

대못이 박힌 자리 - 곽재구 사내가 망치로 대못을 박았다 못은 제 온몸을 나무 깊숙이 투입하였으므로 나무와 못은 서로 행복하였다 세월이 흘러 못은 붉게 물들어 바스러지고 나무의 몸에 빈 구멍 하나가 남았다 늙은 사내가 빈 구멍에 망치로 새 못을 박았다 나무는 제 몸 안에 남은 붉은 녹 몇개를 떨구고는 고요히 구멍과 함께 부셔졌다 *시집/ 꽃으로 엮은 방패/ 창비 화진포 - 곽재구 소금에 절인 고등어 두마리가 갈라진 배를 마주 대고 이팝나무꽃 핀 하늘을 바라보네 장돌림 오십년 늙은 생선 장수는 북관 바닷가 마을이 그리워 죽은 생선의 눈에 임자도 소금 북북 문지르다가 뭉개진 손톱 까만 손등으로 눈두덩을 비비네 하얀 모래의 살들 맨발로 함께 연을 날리던 누이야 해당화 피어 말없이 좋은 날 파도 소리 엄마 젖 ..

한줄 詩 2021.04.29

생의 반 - 백인덕

생의 반 - 백인덕 ​ 최선을 다해 소진했지만 그런 적이 없었네. 세상 모서리 기어이 작은 유리조각이라도 찾아내 반짝이는 종말의 햇빛처럼 지금은 지금, 진자리에 돋는 싹도 최초의 문신처럼 자기 종말을 반사하며 빛나는데 얼굴을 닦았던 젖은 휴지로 책등을 문지르자 부스스 일어서는 못 자국들 의지는 살과 뼈의 결과 또는 허공에 결박하려는 마른 숨결 머리칼처럼 쉬 빠지는 페이지들을 검은 표정으로 굳게 움켜쥔 시흥 외진 인쇄소 절단기의 선명한 이빨 자국 최선을 다해 비틀거렸지만 빙그르 제자리, 마른 그림자만 짙어졌던 결코, 그런 적이 없었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여기와 지금 - 백인덕 ​ 슬그머니 왼팔을 드네 목성이 막 그쪽을 지나갔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네 흔들려도 중심은 없네 사실 죽음은..

한줄 詩 2021.04.29

초록에 잠들다 - 우남정

초록에 잠들다 - 우남정 꽃이 들판을 온통 봄으로 물들이고 간 뒤 먼 산 뻐꾸기 울음 아슴아슴 들려온다 아직도 갈대숲에는 빈 대궁들이 서걱거린다 꽃과 씨앗 다 떠나보내고, 그들은 왜 머리채 휘어잡는 바람과 맞서 긴 겨울을 건너왔을까 취한 아비들이 정거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듯 휘청거리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넘어질 듯 일어서고 있는가 쭈그리고 앉아 그 어둑한 밑동을 들여다본다 젖은 발가락 끝에 송곳니처럼 솟은 두어 뼘의 어린 초록이 보인다 저 어린것들이 제 어미를 먹어치우고 있었던 것일까 낮과 밤을 넘나들며 초록이 초록이 번진다 무엇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저 해묵은 손짓은 눈물 번득이는 칼날 가슴 언저리까지 차올라 차라리 그 초록에 찔려 죽고 싶다는 뜻일까 그예 한 세대를 넘겨주는 것일까 가녀린 쭉정이들의 장엄한..

한줄 詩 2021.04.28

불편한 잠 - 송문희

불편한 잠 - 송문희 뿌리가 뽑혀 떠내려온 몸들 음지에 구겨져 있다 빌딩숲은 야멸차다 햇빛을 끊어버리고 찬바람만 떠먹인다 어떤 나무들은 목에 이름을 걸고 이름을 찍는 순간 회전문이 열린다 지하도로 몰린 풀들은 이름마저 잊어버린 잡초인가 혹여 한곳에 오래 버티면 뿌리내릴 수 있을까 무료 급식에 기대 그 자리에 다시 눕는다 눈총을 덮어쓴 까만 얼굴은 체면을 까먹고 느릿느릿 근육을 줄이고 있다 박스로 구들을 깔고 신문지로 낮잠을 덮었다 지나가는 바람들은 멈춰 서서 무명을 딛고 일어선 가수의 넘치는 햇살을 읽느라 웅크린 잠을 펄럭거린다 불편에 길들여진 노숙의 잠은 금 하나 가지 않는다 *시집/ 고흐의 마을/ 달아실 흔들리는 봄 - 송문희 툴툴거리는 용달차 뒤칸 솜사탕 기계에 기댄 채 단잠에 빠진 여자 신호등이 ..

한줄 詩 2021.04.28

몰꼬을 트다 - 강영환

몰꼬을 트다 - 강영환 이녘 산과 저녘 들판을 적시던 눈물난 홍수가 물러나자 불어났던 강물도 빠진 뒤 갈대 꺾인 강안에는 북녘에서 떠내려 온 흰고무신 한 짝 체증 든 산하에 엎드려 누웠다 한 짝이래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고무신을 끌어 올려 눈두렁에 뉘어 놓고 임진강 젊은 농부는 지나치는 길에 슬쩍 발을 맞춰 본다 아직도 생생한 고무신 주인공은 무사한 걸까 어쩌다가 떠내려 보내게 되었을까 주인도 농사일 하는 무지렁일까 넘나드는 백로에게 신겨서라도 돌려 줄 방법이 없을까 남은 짝 마저 강물에 떠내려 보내 준다면 외짝 고무신 짝 찾는 날 막힌 물꼬를 시원하게 터서 저녘 산과 이녘 들판 적시는 눈물 홍수라도 함께 만들까보다 *시집/ 숲속의 어부/ 책펴냄열린시 늘상 비애 - 강영환 복사빛깔 고운 두 볼에 주려고..

한줄 詩 2021.04.27

허공에 우울증이 매달려 있다 - 심명수

허공에 우울증이 매달려 있다 - 심명수 관념의 다이아몬드 못을 박아 거미가 집을 지었다 먹줄 튕기며, 팽팽한 얼개 때론 탄력 있게 얽어놓고 사람들은 함부로 그 생의 회로도를 빗자루로 쓸어낸다 청소용역인처럼 중요한 증거를 함부로 삭제해 버린다 가끔 누락된 것들 사다리 타고 내려와 쓸려나간 원인을 묻고 가기도 한다 누군가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누락되었다 맑은 허공에 파문이 인다 파문은 거미집처럼 의혹을 남기고 허공을 아파한다 허공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고질병 같은 안개 밀려왔다 밀려간다 말랑말랑한 잠을 흔들어 깨워놓고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 핼쑥한 그림자도 끌고 와 발밑에 함부로 버린 나의 원고들과 생의 질긴 목을 조인다 누가 방아쇠를 당겼을까 반짝이는 물결, 깨진 거울이 생각을 어지럽힌다..

한줄 詩 2021.04.27

벽 장미 - 김선향

벽 장미 - 김선향 수원역 옆구리 고등동 청소년출입금지구역 초입 벽에 그려진 장미 한 송이 빳빳한 오만 원권 지폐를 쥐고 서성거리던 사내가 그리기 시작했을까 돈 대신 장미를 찾아 이 골목을 벗어나고픈 광대뼈 불거진 그녀가 그리다 말았을까 손님이 뜸한 장마철 잎사귀도 가시도 없는 벽 장미는 헤실헤실 웃고 있네 주르륵 피눈물을 흘리네 애초에 글러먹은 칠삭둥이처럼 일찌감치 끝장난 폐인처럼 피다 만 장미 그렇다고 지지도 못하는 붉은, 집 잃은 검은 개 황홀한 향기를 맡으려는지 연신 담벼락을 킁킁거리네 *시집/ F등급 영화/ 삶창 여신 쿠마리 - 김선향 네팔에는 아직도 살아 있는 여신이 있다지 쿠, 마, 리, 혈통과 가계가 온전한 집안의 어린아이는 수십 가지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네 마지막으로 성스러움이 있느냐를 ..

한줄 詩 2021.04.27

밤의 대릉원 - 이운진

밤의 대릉원 - 이운진 이 밤 누가 나를 돌려세워 미혹(迷惑)을 고백하게 하나 나는 지친 걸음으로, 그보다 더 지친 영혼으로 어둠 속을 들여다본다 둥근 달빛 둥근 무덤 사이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삶에서 건너오는 듯 수 세기의 바람이 지나가는데 짧은 생애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나였던가 아무도 기억 못 할 글을 쓰는 수인(囚人)이었고 사랑이 던져버린 돌멩이였으며 슬픔의 징후였으니 이곳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추방자였던가 이제 젊음도 없이 젊은 나를 데리고 나 자신의 허구로 사는 날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한다 빠져나갈 수 없는 아프고 허망한 이 삶도 선물이라는 말로 불러도 되는 건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신을 향해 대답 없는 질문을 하며 둥근 달빛 속 둥근 무덤에 가만히 누워본다 한때 눈물이었고 영광이었던 모..

한줄 詩 2021.04.26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꽃잎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내게 그가 건넨 말이다 캠퍼스를 지날 때마다 라일락 향기가 났다 이상하지, 그가 지나는 어디든 그랬다 바람은 꽃잎을 건드려 향기를 맡는 이라 했다 그의 손동작이 나비처럼 우아해서 내 가슴 위에 내려앉는 나비를 꿈꿨다 속눈썹이 촉촉한 꽃잎 같아 남자 눈이 왜 이리 예뻐요? 차라리 울다가 방금 세수하고 나왔어요,라고 말했더라면 모시나비 날개처럼 섬세한 날개를 꺼내 안아줬을 텐데 손을 잡으면 깜짝 놀라곤 해서 나는 자꾸 장난을 쳤다 뭔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돌을 치우면 숨을 곳을 찾는 가재처럼 그가 스며든 구석구석 들추며 깔깔거렸다 사귈래요? 여자가 무서워요 사랑 때문에 누나는 수녀원 잠긴 창문이 됐죠 별을 믿지는 않..

한줄 詩 2021.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