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이 운다면 - 손남숙

마루안 2021. 4. 19. 19:22

 

 

꽃이 운다면 - 손남숙


어느 집 슬레이트 지붕 골짜기로 흘러 내려오는 붉음 같겠지
박태기는 선명한 분홍색을 핏물처럼 빼내는 중이었어
빈집 꼭대기 위로 올라가 하염없이
머나먼 길을 돌아온 어느 자식의 긴 밤을 같이 보내려던 것이었지
마침 곁에는 밤새 엿듣는 나무가 있었어
벚나무는 우연히 흘러 들어온 방랑객처럼 그 집 마당 구석에 서 있었지 뭔가
운명처럼 서로를 맞대 보는 날도 있는 거지

봄날에 먼저 쏟아지는 건 벚꽃이야
흩날리며 제 울음을 바삭하게 말려 보내면
옆에서 가만히 들어 주던 박태기가 별안간 깜짝 놀랄 분홍색을 만들어
슬그머니 금이 간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꽃들의 눈물이 배어 들어가
눈물은 천장을 타고 무너져 가는 서까래 밑으로 떨어지겠지
삐걱거리던 마루는 다 뜯겨 나가고 없어
꽃잎들이 낱낱이 듣고 새기던 나날은 우묵한 먼지와 같이 쌓였겠지

희고 붉은 꽃들이 떨어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 마당에
커다란 우물 같은 눈망울이 생겨나
그렁그렁 맺히는 사월을 누가 알까
꽃이 운다면 저와 같겠지
색이 없는 마디에서 색이 돋고
가지마다 향기로운 길을 열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네
빈집에 나무와 나무만이 서로 울어 준다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어느 날 사내들이 들판을 걸어간다 며칠 후 사라진다 - 손남숙


골목에는 낯선 사내들이 다녔다
허름한 잠바를 입고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걷는다
그들 뒤로 이장집 개들이 쫓아가다가 말았다
빈집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붕이 허물어진 집은 잠만 잘 수 있다
저녁답 논두렁길을 걸어가는 그들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들에는 양파와 마늘 수확이 한창이고
밭고랑에 앉은 남자들은 수건도 걸치지 않은 채 먼지를 뒤집어썼다
땀 얼룩에 젖은 이마는 붉게 멍들었다
이국에서 온 얼굴은 낯설고 덩치가 컸다
국경을 정복하고 드넓은 초원을 달리던 전사의 후예였다
빈집엔 텔레비젼도 라디오도 없어 그들은 골목을 나와 들길을 걷는다
두고 온 아내와 어머니에게 오래 전화하고 별을 본다
이곳의 별은 고향의 별과 어떻게 다른가
농번기 일손 부족할 때 끌어다 쓰는 인력은 유랑민과 같아
작업이 종료되는 즉시 그들은 캐리어를 끌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온다
삶의 급박한 리듬을 집약해 넣은 곳
몇 벌의 옷과 신원을 증명할 서류가 들어 있는 철제 가방은
바퀴가 네 개여서 잘 굴러갔다
차도와 인도 사이 높은 턱도 거침없이 넘는다
들판이 텅 빈다

 

 

 

# 손남숙 시인은 1964년 경남 창녕 출생으로 한국방송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1년 <갯벌> 동인, 1999년 <일과시>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우포늪>,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가 있다. 경남작가회의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