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오이지 - 박위훈
자귀나무 꽃그늘에서 찍은 가족사진처럼
짜디짠 가난이 서로를 옭아매 두었던
흑백사진이다
골마저 허옇게 낀 독 안의 염천(炎天)
단칸방, 쉰내 나며 부대끼던
내 키만 한 옹기그릇이다
감자며 옥수수 삶아 멍석에 둘러앉았을 때
무짠지와 빠지지 않던
저녁 두레밥상이다
누름돌 괸 오이지 쑤석이며
닳은 손끝으로 간을 보던
쭈글쭈글한 어머니의 아린 손이다
비칠비칠 빈손뿐인 나,
늘 낮은 곳에서 살갑다 꼬리 치며 괴던
댓돌 밑 누렁이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면 하는
여름도 한걸음 쉬어가는
찬밥 한 덩이다
*시집/ 왜 그리운 것들만 더디 바래지는지/ 상상인
허물이라는 허물 - 박위훈
여름의 짧은 문장은
뾰족한 염천을 내딛는 울음의 한때
허공의 우듬지를 흔드는 건 매미
지루한 반복음을 해석해 듣는 그늘 속
울음의 절정은 침묵이다
끊일 듯 이어지며 제 귀를 앓는 저 맹목
짧은 휴식이거나 누군가의 구애이거나
무형의 활과 현으로 여름을 켜던
살아 몇 날이 툭, 끊어질 실타래가 아니길
막바지 땡볕의 문장 태지에 옮기지 못했는지
간헐적 울음이 장맛비처럼 들쑥날쑥한 건
아직 소리의 결을 풀지 못했기 때문
울음이 이어진다는 건 어떤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
다가갈 수 있는 빌미를 슬쩍 내보이는 것
울음자리에 허공 한 칸 들여 벽이라 불러본다
소리의 결을 푼 증표가 허물이라면
침묵의 완성은 우화(羽化)다
어떤 루머는 견고한 사랑을 허물기도 한다
데면데면한 사이를 허물어가는 것도 허물의 한 과정
옐로카드를 내밀며 곁 한 번 주지 않는
너라는 거기
허물을 가리기 급급해 허물조차 허물 줄 모르는
*시인의 말
시를 쓸 때만큼 갈증 난 적 또 있을까
슬픔의 비기(悲器)를 채워줄 한 줄 문장들
얼마나 갸륵한지
시,
길고도 짧은 만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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