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커피 - 박용하

마루안 2022. 8. 10. 21:53

 

 

커피 - 박용하

 

 

지상에서 마시는 겨울 커피 한 잔
혼자 노는 데 타고난 커피 한 잔
검은 눈물이라고 그랬나
너는 4만 킬로미터를 간다
너를 자주 찾던 그는
비 내리는 가슴을 지닌
길을 아끼던 나무 인간이었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삶이 되살아났다
머나먼 이국에서 온 검은 시간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마시며
슬픔의 바닥에서 젖는 비의 얼굴을 본다
그에겐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때때로 이 비루한 거리에서
한 잔의 커피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저녁을 찌르는 술 한 잔과
지상을 떠나가는 맛으로 담배 한 대를 더하고 싶었을 게다
그는 외롭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마로 만나는 사람이었다
고개 돌리면 얼음 사회가 버티고 서 있었다
삶은 대책이 없었고 죽음은 어찌할 줄 몰랐다
지상에서 마시는 겨울 커피 한 잔
눈보라와 노는 데 타고난 커피 한 잔
발바닥에 넣어 두었던 사람을 저녁이 보내고 있듯이
하루하루는 무덤이 되고
일생은 하루하루의 장례식
여러 말이 필요치 않았다
인간에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았다
커피 한 잔 천천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그는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게 그가 원하는 하루의 핵심이었을 게다
검은 심연이라고 그랬나
검은 순간이라고 그랬나
너는 4만 킬로미터를 간다
너는 조용히 인류를 지배한다
석양 뒤에서 마시는 겨울 저녁 커피 한 잔
혼자 놀 줄 모르는 인간과는 같이 놀지 않는 커피 한 잔

 

 

*시집/ 이 격렬한 유한 속에서/ 달아실

 

 

 

 

 

 

엄마 - 박용하

 

 

내 여자는 엄마가 되었고

엄마는 둘도 없는 내 여자였지요

뭘 더 바라겠어요

난 이상한 아이였어요

엄마가 오던 날

빛 깨지던 바닷가로 도망쳤지요

무슨 저런 아이가 다 있냐고

마을 사람들이 눈 흘기며 수군거렸지요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난 동해에서 파도를 주우며 자랐어요

파도의 격동을 들으며

태아의 시절을 지나왔지요

난 혼자를 좋아했지요

해와 달처럼 혼자 지냈지요

아빠가 오던 날이었지요

내 말은 바위섬에 못 박히고

눈동자는 수평선 근처로 다이빙했지요

차라리 아빠가 오지 않기를 바랐어요

와도 어서 가기를 바랐어요

난 눈물이 우는 아이였어요

파도를 달리며 해변을 누비던 아이였어요

혼자를 달렸지요

혼자를 원했지요

타고났어요

뭘 더 바라겠어요

엄마는 둘도 없는 나의 아름다운 사랑이었지요

이젠 뭐 더 말라먹을 것도 없어요

그녀가 가던 날

비 깨지던 방파제로 나갔지요

눈물 부서지던 수평선으로 나갔지요

내 여자는 엄마가 되었고

엄마는 끝까지 발라먹히다 버려진 뼈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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