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 강회진

마루안 2022. 8. 1. 21:38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 강회진

 

 

도시서 지내다가

가로등 드문드문

마동 마을에 들어오면

먼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

순하고 착해지는 것 같다

먼 미래에 가 있는 것 같다

 

아무렴,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걸 지켜볼 수 있지

이른 새벽 마당 몰래 쌓이는 눈 지켜볼 수 있고

건너편 거대한 숲 흔드는 바람소리 들을 수 있으니

 

착하고 순한 건 연약한 걸까 강한 걸까

혼잣말하다가

마당에 어둠이 내리면 제일 먼저

씩씩하게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적당히 불길이 사그라들면 그 불이 아까워

고구마를 구워 낸다

옷에서 불 냄새가 났다

오래전 불 때 밥하던 늙은 어미가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연습의 시간들

일테면 나는 지금

과거와 미래에 적응하는 중이다

그것도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현대시학사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 강회진


삼십 년 동안 아비의 생을 지탱해 준
버드나무 한 그루
도대체 얼마나 한다고
오라비는 제멋대로 버드나무를 팔아버렸나
덩달아 뿌리째 뽑혀나가
마구 뒹구는 기억들
버드나무 아래 앉아서
침착하고 내성적인 죽음을 기다리던 아비는
생생한 헛헛함으로 허둥대신다

다 해봤어요
이생에서 더 해볼 게 없어서
버드나무가 돈이 되나 알아봤어요
귀농한답시고 들어와 다 팔아치우는
오라비는 눈치가 없는 건가요,
배짱이 무궁무진한가요

아비는 아직 살아 있고
오라비는 돈을 벌었어요
실패했다, 라는 문장의 주어는 언제나 저예요
다행이지요
제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매번 지고 말아요
팔랑이던 초록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상냥했던 인생은 이제 바빌론 강가에서나 만날 수 있어요

버드나무 팔려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날,
눈먼 가수가 검은 제비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부르는 노래를 밤새 들었어요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고
혼자인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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