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노인의 예감 - 부정일

마루안 2022. 8. 3. 21:45

 

 

어느 노인의 예감 - 부정일

 

 

할멈, 당신이 팔순 넘겨 오라는 당부 때문에

빈자리 옆에 누워 자고 일어나기가 지루했는데

팔순은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았는데

할멈 죽고 이 년이던가

하나 남은 막살이를 아들에게 증여할 땐

나, 먼 길 갈 때까지 막살이에서

할멈이 두고 간 것들 만지다가

어느 날 조용히 따라가리라 생각했었네

객지 나간 아들이 살다가 어려워 빌린 빚이

팔아 간 돌랭이로는 모자라

막살이마저 비워줘야 하네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곳이야 이 넓은 세상

밤이슬 피할 문간방쯤은 있겠지만

채권자 양반이 오는 봄까지 기한은 줬으니

할멈, 그나마 올겨울은 걱정이 없네

아들놈이야 다시 일어설 테니 걱정 마오

잘난 자식에게도 어려운 시기는 있는 법

한때는

할멈과 나도 힘든 고비 넘기며 살았잖소

수중에 있는 몇 푼은 손자에게 주고 가리다

아이들 보다가 오라는 부탁은 여기까지요

지루하고 외롭던 날들 보내다 어느

꽃피는 봄에 당신을 볼 수 있다는 예감으로

나, 이제 조금도 외롭지 않아요

 

 

*시집/ 멍/ 한그루

 

 

 

 

 

 

꽃구경 - 부정일

 

 

우리 형님이 가야 할 요양병원은 산 중턱에 있어

앰블런스는 벚꽃 핀 길 따라 산으로 간다

종합병원서 열흘 남짓 포도당 수액 달고

요양병원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물어

더 좋은 병원으로 간다 하자 기저귀 찬 몸이

고개 돌려 눈 감는다

평생 함께한 아내는 벽 잡고라도 버티지만

늙은 남편 돌볼 여력은 안 되는걸

외지로 출가한 아들 둘 딸 넷이 어쩌라고

앞가림하면 됐지 얼마나 더 잘하라고

뻑하면 아들 며느리 비행기 타서 오게 하고

한때는

백수의 왕처럼 무소불위로 집안의 중심이었다고 해서

차마 고려장 할 나이에 똥 수발까지 시키지는 못해

하루 이틀 몇 수저 뜨다 말더니 결국

119 부르고 응급실로 가더이다

자이윤처럼 스타의 삶도 한순간

비루한 몰골로 누워만 있는 것도 싫다

이곳은 막차 기다리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터미널

최후에는 누구나 아들놈 등에 업혀 여기로 온다

이 봄마저 저물어 막차를 타야 하는 그날이 오면

꽃구경 잘했노라 하고 장사익의 노래 꽃구경, 한 소절

흥얼거리며 가야 한다

 

 

 

 

# 부정일 시인은 1954년 제주 출생으로 2014년 <시인정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허공에 투망하다>, <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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