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마루안 2021. 6. 26. 21:59

 

 

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한 달에 한 번 병원 침대에 누워

외눈 덮개로 얼굴 가리고

황반변성 안구주사를 맞고

거즈로 덮은 눈과 산동산(散瞳)약 넣어 초점 잃은 눈 위에
안경을 얹고

희미하게 놓인 구두 찾아 꿰 신고 병원을 나선다.

어른거리는 붉은 불빛, 걸음을 멈춘다.

 

9년 전인가 서천군 마량 선창가,

생선 부리는 배에 걸린 늘어진 깃발들이

안개 속에 갑오징어들처럼 매달려 있을 때

생선 잔뜩 실은 자전거 무게에 눌려

핸들 붙잡고 꼼짝없이 서 있던 사내,

눈은 뜨고 있었던가? 잠깐이 한참이었다.

안개 저편에서 인기척처럼 경적이 울리고

핸들에 매달린 그가 자전거 바퀴에 끌려간 뒤에도

나는 거기 서 있었다.

용케 넘어지지 않고 안개 밖으로 빠져나갔군.

걸음 떼는 순간 내가 그만 발 헛딛고 비틀거렸지.

 

동공 열린 안구에 인기척처럼 푸른빛이 들어온다.

살짝 굳은 안개 같은 땅을 밟는다.

투명하게 걷자.

더 잘 보이는 땅에서 비틀댄 적도 있었어.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조그만 포구 - 황동규


삶의 폭 점점 졸아들다
조그만 포구 되었다.

하루에 버스 한 번 들고나는 곳.

눈인사하며 지내던 사람
다시 보면 뵈지 않고

빈집에 안개처럼 피는 꽃들,

파도가 밀려와 조그만 방파제 넘다
물보라 되고

가을이면 단풍이 뒷산을 듬성듬성 색칠하다

다시 보면 빈 나무들만 남는 곳.

 

아침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조그만 고깃배들이 아침을 데리고 온다.

어떤 날은 버스가 안 들어오고

파도가 파도를 무동 타고 방파제를 넘기도 한다.

공중에 뛰어올라 빛나는 물고기도 있다.

속으로 소리 친다.

떨어지기 전 방파제 끝에 액막이 제웅처럼

뻣뻣이 서 있는 인간을 내려다보게.

그러곤 공중 맛을 본 몸뚱어리를

타악! 출렁대는 삶 한가운데로 내리꽂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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