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명왕성의 항변 - 주창윤 태양도 깨어나서 보지 않으면 죽은 별이다. 나는 늘 깨어 저 바깥 끝에서 밀짚모자 같은 토성이나 삶은 달걀 같은 행성들의 소멸을 바라보며 슬퍼하였나니 내 품계가 몇 단계 떨어져서 들어보지도 못한 왜소행성이 되어 그냥 떠돌이 별이 되었지만, 너희들의 바깥에서 더이상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그 끝에서 기체의 사유로 살아왔다는 것을 아느냐! 저 바깥 끝에서 살아온 삶의 경계를 너희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깨어 있지 않으면 태양도 그냥 죽은 별이다.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사우나 출애굽기 - 주창윤 재앙의 나날들이었다. 열정의 청년 노예들은 애굽으로 팔려갔다. 한강 하구는 녹차라테가 되었고 양서류들은 시내의 우물마다 알을 낳았다. 열대 박쥐 떼가 들끓었고 독..

한줄 詩 2021.07.18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 전장석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 전장석 고갯마루를 마수걸이한 마을버스가 몇 사람과 접점하고는 내리막길로 이항한다 간판이 분필로 쓰인 책방은 방금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려던 중이다 ​저녁 산책의 중력파가 만리동까지 미치면 거기, 작동이 멈춘 낡은 탁자 위의 시간들 수공(手工)이 되어 나를 내부 수리한다 무중력의 이 도시를 용감하게 횡행하던 한 권의 시집, 단 한 줄의 문장 속엔 궤도를 이탈한 소우주가 지구본처럼 떠돌고 평생 떨어진 사과를 줍다 허리 휜 내 이력이 통증이 가시지 않은 호롱불로 밤새 매달려 있다 막대그래프 같은 아파트와 낮은 곡선의 지붕들 그 아찔한 간극에서 자주 멀미하던 바람이 서점 어딘가에 불편한 기록으로 꽂혀 있다는데 언제쯤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불구의 시간들이 버릇처럼 그리움으로 발..

한줄 詩 2021.07.18

거울의 내생 - 고태관

거울의 내생 - 고태관 포대기에서 아기가 운다 잠에서 깨면 늘 목이 쉬었다 혼자서 양말 신고 바지도 입는 여섯 살 풀린 신발 끈 일부러 안 묶는 중학생 담치기하다가 따귀 맞는 고등학생 입대 전 벌거벗은 애인에게 안겨 잠든 새벽 소름처럼 돋아난 눈이 떠진다 다시 잠들면 복도에 쫓겨나 있었다 마흔 번째 생일 분에 넘치도록 취해 잠들었다가 오후 늦게 일어나 세수를 한다 반쯤 감긴 눈에 흐리게 고여 고개를 돌릴 때마다 거울과 마주친다 지금 나는 아흔이 된 내가 꾸는 악몽 머리가 지끈거리고 다리가 끊어진 듯 쑤신다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져 자정이 자정으로 이어지고 꿈쩍할 수도 없다 온종일 벽에 기대 있는 늙은이 가는 숨을 몰아쉰다 잿빛의 눈으로 허공을 비춘다 어제 꾼 꿈은커녕 당장 나도 건져 올릴 수 없다 무릎..

한줄 詩 2021.07.18

빗방울들 - 박주하

빗방울들 - 박주하 더 멀리 가 봅시다 가장 멀리 가는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멀리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각자 자기소개는 하지 맙시다 완벽한 하나의 사건처럼 순식간에 불거졌다가 사라집시다 시간이란 슬픈 눈망울을 버리고 흘러내리는 것은 목숨을 만져 보는 일 전생에서도 잊지 못한 미소를 생각하며 최대한 멀리 뛰어내려 봅시다 서로의 어깨를 부축하지도 말고 젖을수록 단단해지는 돌멩이처럼 이 밤을 훌쩍 넘어갑시다 거짓말을 들은 기색 없이 서로의 눈물만 들고 바닥으로 달아납시다 바닥은 힘이 없으니 장렬하게 무너집시다 불빛이 비에 젖어 번지는 저 길바닥의 무늬 속으로 사라집시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칠점사 - 박주하 -무심무석(無心無石) 그는 칠점사에 물려 몇 달 기억을 잃었..

한줄 詩 2021.07.17

저녁 강이 숲에 들어 - 박남준

저녁 강이 숲에 들어 - 박남준 강에 나가 저녁을 기다렸네 푸른빛이 눈부신 은빛이 전율처럼 노을을 펼쳐 파문의 수를 놓고 있네 이럴 때면 눈물이라도 찍어내고 싶은데 황금빛 능라의 베틀을 걸어 수만 수천 구비 노래하는 물결들 단숨에 물들이는 시간 말이야 누군가는 저 강에 들어 생의 마침표를 찍고 싶다 하였네 사람도 숲에 들면 고요해지듯이 내리꽂고 솟구치며 세상의 낮은 곳으로 노래하다 분노하여 범람하고 길이 막혀 신음하던 강물도 반짝이는 모래톱과 화엄의 바다 가까이 가닿을 거야 거기 갈대의 숲 안식에 든 숨결들을 생각하며 자장자장 찰랑이다 잦아들겠지 저녁 강은 바다에 이를 것이네 숲에 들 수 있겠지 그곳에서는 비상하던 새의 허공도 낡고 고단했을 발자국도 적막에 안길 것이네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한줄 詩 2021.07.17

단단한 멍 - 이기록

단단한 멍 - 이기록 살아남은 사내가 문을 연다 알몸으로 부르는 빈 구멍들은 숨바꼭질을 하는지 굳은 유령의 옷을 입고 멈추지 않는 비린 장례식에 녹아내리는 피부를 덮었다 퍼붓는 소금기를 남기고 분열하는 식지 않는 불안을 지불하며 비틀거린다 더 깊이 부패하기 전 땅은 등 굽은 문자를 남긴다 목소리를 벗기며 더는 말 할 수 없는 장면 불면의 촉수가 냉정한 가슴을 동여맨다 타는 몸을 잉태하지 말고 사라진 태양을 안고 잠들 수 있게 오지 않은 절망이 사라지기를 우린 단단한 꽃멍이 든다 *시집/ 소란/ 책읽는저녁 그러니 한번 말해보자 - 이기록 그러니 한번 말해보도록 하자 그래, 나는 이미 없는 사람과 살아간다 이미 없는 사람과 연애를 하니 고민스럽다 누워있는 밤에 헐떡일 때쯤 매번 손가락을 잘라 바닥에 뿌려둔다..

한줄 詩 2021.07.17

주름 - 김명인

주름 - 김명인 나이답지 않게 팽팽한 얼굴을 쳐다보다 눈가장이에 더께 진 잔주름을 발견하지만 다독일수록 엷어지는 것도 아닌데 목덜미까지 파고든 몇 가닥 실금 가리려 애쓰는 건 그것이 조락을 아로새긴다는 확신 때문, 아무리 변죽을 두드리며 달래더라도 주름에게 하루하루란 윤택한 시간이 아니다 쏟아져 내리는 여울처럼 시원하던 복근이 어느 날 이마며 두 볼에도 흉물스럽게 옮겨 앉는다 손금 하나로 골목을 주름잡았다는 그를 볼 때마다 잔골목이 하도 많은 동네라서 길 잃기 십상인 나도 맨발인가, 아기는 쪼글쪼글한 주름 발바닥까지 휘감은 채 태어난다 울음을 터뜨리며 종주먹질해대는 말년이 아니더라도 주름은 누구의 것이든 삭은 동아줄인 것을, 그걸 잡고 우리 모두 또 다른 세상으로 주름져간다 주름투성이의 손바닥을 움켜쥐고..

한줄 詩 2021.07.16

건너와 너머 - 최준

건너와 너머 - 최준 ​ 산을 읽었다 아니, 산을 가뒀다 지난가을 단 한 번 간 주말 산행에서 나는 산을 비웃었다 칼라 문신을 전신에 새긴 산의 정적을 답보하면서, 우스웠다 어제 내린 비로 산은 속이 좀 상했던지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어야 했지만 지상에 남아 있는 우산이나 우비는 더 이상 없었다 머지않아 옷 벗고 추워져야 할 텐데 문장의 끝에 있어야 할 마침표가 올해도 안 보였다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할 것만 같았는데 없는 것이 있었다 산의 머리맡에서 쉼표 하나 겨우, 황급히 찍어 놓고는 갔던 길을 다시 돌아 내려왔다 더럽게 예의 없다고, 신고 갔던 운동화가 투덜거렸다 숨 가삐 올라갔던 그게 산이었는지, 아니면 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별들의 서식처를 여전히 염탐하..

한줄 詩 2021.07.16

혼자 울 수 있도록 - 이문재

혼자 울 수 있도록 - 이문재 -오래된 기도 3 혼자 울 수 있도록 그 사람 혼자 울 수 있도록 멀리서 지켜보기로 한다 모른 척 다른 데 바라보기로 한다 혼자 울다 그칠 수 있도록 그 사람 혼자 울다 웃을 수도 있도록 나는 여기서 무심한 척 먼 하늘 올려다보기로 한다 혼자 울 때 억울하거나 초라해지지 않도록 때로 혼자 웃으며 교만하거나 배타적이지 않도록 저마다 혼자 울어도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을 누군가 어디선가 지금 울음 그쳤을 누군가 어디에선가 이쪽 하늘을 향해 홀로 서 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혼자 있음이 넓고 깊어질 수 있도록 짐짓 모른 척하고 곁에 있어주는 생각들 멀리서 보고 싶어하는 생각들이 서로서로 맑고 향기로운 힘이 될 수 있도록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혼자의 넓이..

한줄 詩 2021.07.16

미용실이 그리 멀지 않은 재개발지역 - 심명수

미용실이 그리 멀지 않은 재개발지역 - 심명수 이미 빠져나간 길들은 헝클어지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겨진 창들은 출출하게 닫혀 있다 출출한 골목을 오르면 꼬르륵 허방을 딛고 내려오는 어둠 물밀 듯 살아온 날들이 고스란히 철거당하는 마음이다 너는 머리를 자른다 집집마다 추레함이 흘러내린다 켜지 않은 창은 꺼진 창이라 할 수 없듯 나이가 들수록 캄캄해지는 얼굴 밀가루 반죽처럼 뭉개졌다 국수가락으로 쏟아내는 풀어진 면발이 찰랑거린다 펌을 한다 나도 서둘러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다 쫓기듯 등 떠밀리는 도미노의 연쇄반응에 집집마다 버려진 세간, 세간살이들 길가에 나앉은 헐렁함, 고단함, 고집 센, 의자, 찌그러진, 쓰레기들이 범람한 나의 몽실몽실한 머릿속이 곱슬곱슬하다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상상인 수제..

한줄 詩 2021.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