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하느님의 시계 - 이상원

하느님의 시계 - 이상원 세상에서 퇴출된 내가 아직 거기 근무 중인 당신과 통화를 한다. 멈추거나 뒷걸음질하는 건 죽음이에요. 분리대를 넘기 전엔 속도를 맞춰가며 앞으로만 가야 해요. 나는 시간의 굴곡을 걸어서 온 사람, 바퀴들의 언어를 알 수도 없었고 지나가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길을 이미 아는 까닭에 북극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돌아보지 마세요. 환영(幻影)에 집착하는 눈알들은 도태되고 말거에요. 애당초 눈먼 내게 뒤돌아볼 거울일 있을 리가 없지만, 회춘을 꿈꾸는 누구도 복원의 시점을 대답할 수 없으므로, 하느님의 시계가 거꾸로 돌지 않는다는 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앞서간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퀴들의 영역을 벗어나 전파가 잘 닿지 않는 산기슭에 접어들자 무수한 발자국의 지문이 화석 된 ..

한줄 詩 2021.07.05

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아주 오래된 기억 - 함명춘 바람 불면 바람 부는 쪽으로 풍애마을 한쪽 발을 지그 밟고 서있는 느티나무의 가지가 힘없이 기울어지곤 하였다 태양의 억센 팔뚝 안에서 월척같이 뛰어오르는 여름 마을 사람들은 비가 내리기만을 손꼽아 고대했지만 늘 하늘은 굳게 입술을 다물고 기다림의 가지 끝에선 맑은 피 대신 누런 고름이 새어 나왔다 마른 장작개비처럼 갈라진 전답들이 쉬 오지 않는 잠 근처까지 떠밀려 왔다 떠밀려 갔다 몇 평의 그늘을 일구며 바짝 푸른 허리띠를 졸라매는 물오리나무 숲 자꾸만 잔뿌리들은 죽음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책보다 배고픔이 더 가득 들어찬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피라미같이 쏟아져 내려가는 하굣길을 따라 무작정 싱경한 열여덟 열아홉 살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어둠의 발자국 소리가 되어..

한줄 詩 2021.07.05

울음의 두께 - 이서린

울음의 두께 - 이서린 아직 태어나지 못한 울음이 있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이 검고 어두운 바람 소리로 창을 닫아도 커튼을 내려도 사방에서 밀고 들어와 몸을 빨아들이는 울음이 있다 여덟 살의 머리 위로 해는 넘어가고 사람을 삼킨 기차는 길게 울었다 밤길을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기어이 대문에 걸려 흔들리던 조등의 불빛, 각혈 자국 선명한 수돗가엔 빨다 만 옷가지가 흩어졌었다 치자꽃 향기 울컥 몰려 오던 밤의 교정에서 끝내 귀신으로 한 번 보았던 사람, 핏물 어린 입술 깨물며 술잔을 치고 무덤에서 불렀던 이름도 있다 굽은 골목 더듬더듬 손전등도 없이 훌쩍이며 헤어진 길을 뒤짚어 간 시간은 아직 거기 있을까, 세상의 난간에서 펄럭이다 펄럭이다 찢어진 깃발은 그 밤마다 잠들지 못한 짐승이 있다 어쩌면 차마 눈감지..

한줄 詩 2021.07.04

두 자리 - 천양희

두 자리 - 천양희 스스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이 산을 보는 마음이라면 스스로 비우겠다는 마음이 물을 보는 마음일 거라 생각하는데 들을 보는 마음이 산도 물도 아닌 것이 참으로 좋다 살아 있는 서명 같고 말의 축포 같은 참 그것은 너무 많은 마음이니 붉은 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붉게 피어 견딘다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일상의 기적 - 천양희 갈 길은 먼데 무릎에다 인공관절을 넣고 지팡이는 외로 짚고 터벅터벅 서울 사막을 걸어갈 때 울지 않아도 눈이 젖어 있는 낙타처럼 내 발끝도 젖는다 갈 데까지 걸어봐야지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가봐야지 요즈음의 내 기적은 이 길에서 저 사잇길로 나아가는 것 딱 한걸음만 옮기고 싶은 고비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 꿇었던 뒤에도 서서 걸었던 자국 ..

한줄 詩 2021.07.04

동백의 여백 - 박남준

동백의 여백 - 박남준 동박새가 찾아와 쉴 자리가 동백의 여백이다 그늘을 견딜 수 없는 숙명도 있지만 다른 나무의 그늘에 들어야 잎과 꽃의 여백을 만드는 나무가 있다 동백의 여백을 생각한다 혼자 남은 동백은 지독하도록 촘촘하게 모든 여백을 다 지워서 가지를 뻗고 잎을 매달아 그 아래 올 어린 동백의 그늘을 만든다 곁에 다가와 노래하는 자리가 그 사람의 여백일 것이다 여백을 가지고 있는가 누군가의 여백을 위해 스스로 그늘을 가득 채워 버렸는가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걷는사람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 박남준 불시착의 연속에 있었다 바오밥나무들이 점등을 시작한 비상활주로의 길 끝에 사막은 시작되었다 사막이 공간이동으로 뛰어든 이유는 불시착의 그 처음이 발단이었다는 정도로 생략하겠다 그리하여..

한줄 詩 2021.07.01

어떤 이별 - 전인식

어떤 이별 - 전인식 -구두와 대머리 아저씨 전철이 막 출발하려고 스르르 문이 닫힐 때 이 열차 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듯 머리가 약간 벗어진 중년의 아저씨 이종범이 2루 도루를 감행할 때의 슬라이딩으로 아슬아슬 한쪽 발이 먼저 닿아 세이프되려는 순간 슬금슬금 움직이던 열차에 결국 사람 대신 벗겨진 구두 한 짝만 타고 말았습니다 처음 신고 나온 반짝거리는 새 구두 한 짝만이 볼일 급한 주인 대신 어디 다녀올 듯 객실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말았습니다 신발을 찾으려, 열차를 잡으려 창밖에 아저씨 손짓을 해가며 전철과 나란히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안타까운 광경 앞에 사람들 하나같이 탄성을 지르며 터질 듯한 웃음으로 아쉬움을 대신했습니다 인정 많은 기관사 몇 발짝 움직이던 기차를 멈춰세워 다시 한 번 문이..

한줄 詩 2021.06.30

필요 이상의 호기심 - 박순호

필요 이상의 호기심 - 박순호 햇빛이 펄럭거린다 타락한 웃음, 검은 어깻죽지에도 불의 혀가 핥고 간 흰 재 위에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과묵한 표정 앞으로 두 팔을 펼치는 찬란 쳐내고 쳐내도 거친 표현이 웃자란다 나는 몸을 낮추고 깨지기 쉬운 가장자리부터 약속되어 있지 않는 모든 것 고여 있는 침묵을 움켜쥐지만 어딘가에는 차가운 성질이 숨어 있고 막상 내가 꺼내놓은 물건들마다 싸구려 냄새가 진동한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건방진 말투 필요 이상의 호기심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아이들은 그늘을 늘려갔고 즉흥적인 기분은 대부분 찢겨져 파기된다 안개를 들춰내고 푸른 줄기를 꽂아놓는다면 서정이 되는가 그렇다면 바싹 마른 잎을 조금 더 붙잡아둘 수 있을까 때로 웃음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일들 문서로 꾸며진 일련의 협박들 ..

한줄 詩 2021.06.30

미자의 모자 - 이산하

미자의 모자 - 이산하 시를 쓸 때마다 이창동 감독의 명화 가 떠오른다. 잔잔한 강물 위로 엎어진 시체 하나가 떠내려온다. 하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죽어서도 엎어져 있다. 멀리서 내 앞으로 운구하듯 천천히 다가오면 마침내 영화 제목이 수면 위에서 잔잔하게 일렁거린다. 시와 그리고 시체.... 언제든 예기치 않은 것들이 내 앞으로 떠내려온다. 진실은 수면 아래에 숨어 있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시는 생사가 같은 날이라는 듯 강물이 운구하고 그렇게 얼굴이 사라져야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는 듯 마지막으로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무심히 흘러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물이 표정을 바꾸지 않을지라도 단지 떠내려가는 것만 보여주는 게 시는 아닐지라도 결국 세상의 모든 시도 수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미자의 모자처럼 물에..

한줄 詩 2021.06.29

늙은 남자 - 임성용

늙은 남자 - 임성용 종각에서 종로 3가까지 서울의 도심 일대를 태극기를 든 늙은 남자들이 점령한다 늙은 남자가 탑골공원에서 성매매를 하려다 돌아선다 그럴 때면 눈이 먼 비둘기가 더 슬프다 술에 취해 비척거리는 우산을 보았다 우산을 버린 늙은 남자가 국밥을 먹고 어슬렁거린다 늙은 남자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기세등등하다 젊은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조심스레 피해 간다 주먹만 남은 눈동자가 흘러내린다 검은 버섯이 흘러내린 듯 골목이 질척인다 동구 밖 오래된 느티나무가 죽었다 넓고 다정한 그늘이 떠나고 막연한 계절이다 *시집/ 흐린 저녁의 말들/ 반걸음 적암 - 임성용 강에서 태어난 안개는 여태 걷지 못하고 지난밤의 고요를 덮고 있었다 버드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 하나가 성긴 바람의 그물에서 빠져..

한줄 詩 2021.06.29

입산 - 강영환

입산 - 강영환 눈을 맑히기 위해 산에 들었다 비 온 뒤 숲은 깊어지고 고요하다 갖은 잎들이 흔들리면서 아는 체 눈에 든 나쁜 소리들을 지워가고 엽록소로 향기를 데려 와 코를 세워 준다. 각자 틈새 슬금슬금 들여다보는 하늘빛도 회색 벽에 갇혀 졸아든 살갗을 터주고 신경 끝까지 따라와 손등이 맑아졌다 산길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가고 보이지 않던 새소리가 몸에 들어 와 뜻풀이 해보라며 난해하게 지저귀었다 어찌 알 수 있을까 그 해박한 깊이를 어쩌다 한 번 산에 들어 사는 눈에는 풀잎에 떠는 바람조차 어둠인 것을 온 몸이 산으로 가득찬 가벼움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는 내 눈을 깎아 귀를 넣고 작은 바늘 하나 얻어 가리다 도시 날카로운 모서리에 상처입은 사람들은 숲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나도 가..

한줄 詩 2021.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