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월의 구름 - 최준

마루안 2021. 6. 22. 22:30

 

 

유월의 구름 - 최준

 

 

흙먼지 뒤집어쓰고도 하얗게, 환하게 웃던

아까시꽃이 너무 눈부셨을까

길이 피를 더렵혔다고

이제 그만 객석에서 일어서야 한다고

극장 뒷문으로 공기처럼 조용히 사라지던 그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스크린에서 계속되는 도살

관객들은 너무 잔혹하다며 아우성이었는데

어떤 매몰지도 그를 기다리지 않아

소리 없는 세계로 가고자 했던 걸까

나이가 서른 살이었던 건

그가 이십 대의 산맥을 지나왔다는 것

모든 소멸을 무사히 버텨냈다는 것, 그러니

자 이제 어디로 간다?

복수로 무거워진 배를 끌어안고서는

복수를 꿈꿀 노릇도 이미 아니었는데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닌

말씀으로 내일을 예언하던 일기예보

믿지 못하고 멈출 수도 없어

그는 허공에 발을 내딛기로 했다

내 귀가 너무 커져서 그래

옥상을 긋고 지나간 단 한 줄의 유서

그가 49층에서 떨어져 죽은 건

그가 49층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영원으로 가는 탈출구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30만km를 몸통에 새긴 자동차 지붕 위

우산 쓴 조문객들이 흘린 눈물로

아까시 꽃무덤이 완성된 아침이었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수련 일기 - 최준

 

 

올해는 우기가 늦었다

비를 기다리다가 저수지는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주인공의 때늦은 출현은 속편이 있다는 걸 예고하기도 하지만

날림 제작한 속편은 종종 보상을 원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울음주머니라도 옆구리에 차고 있지 않으면

하늘 잃은 물잠자리를 위해

한 장 손수건이라도 준비해야 한다

 

안타깝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곁에서 경쟁적으로 가뭄을 숨 쉬던 당신이

습지의 법칙에 대해 좀 더 세세히 알고 있었더라면

먼 별 하나와 이웃 풀꽃 한 송이를

맞바꾸는 밀거래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을 텐데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잠자코 기다려 보기로 한다

다른 해보다 늦게

우기가 시작되리라는 태양의 거듭된 전갈을

 

왜인가 당신이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우주만큼 크고 튼튼한 내 우산이

때로는 물방울 하나의 투명에도 담뿍 젖는 날이 있기에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너 아직 거기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칸트의 산책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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