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선천적 우울 - 박순호

선천적 우울 - 박순호 자궁 안에서는 우울마저 따듯했다라고 아직 영글지 못한 그늘 아늑했다라고 쓴, 작위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근황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양수가 터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것이 핏줄을 붙잡고 기웃거릴 거라고 내가 가진 높이를 휘감아 오를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행성을 닮았다는 천문학자의 말 외계생물 같다는 과학자의 말 뿔 달린 귀신이라는 무당의 말 강박증이 가지를 쳤다는 심리학자의 말 그러나 나는 충분히 우울했으므로 주석 따위는 달지 않았다 까마귀가 앉았다 떠난 나뭇가지 검은 깃털이 걸려 있다 우울을 가꾸던 검은 사제 검은 사체들 두서없이 쌓이는 저 막막함!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애도하는 삶 - 박순호 물 위에 쓴 일기는 멀리 멀리..

한줄 詩 2021.07.15

이후 - 윤의섭

이후 - 윤의섭 오늘까지는 꿈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유골단지 지난 번 갖다 놓은 꽃에 생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건 같이 기억할 수 있다는 가능성 너라는 꿈을 꾼 것이다 운중로라고 쓰인 길에 들어서면서 한 번은 다시 오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주인이 바뀌었지만 식당에선 익숙한 저녁밥 냄새가 나고 천년 궤적을 따라 줄 지어 날아가는 새들 눈을 감으면 세상의 모든 태양이 차례로 지고 구름 속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모두 구름 속으로 착륙하는 동시의 기억 오늘부터는 처음 부는 바람과 처음 생긴 빗방울 사이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유골단지가 잠들어 있다 누구였을까 꿈이 다 지워진 것만 생생하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그 후 - 윤의섭 오늘 아침은 깨진 조각 나는 파편에서 눈을..

한줄 詩 2021.07.12

역병이 도는 여름 - 이상국

역병이 도는 여름 - 이상국 역병이 도는 여름 이웃집 백일홍이 피자 동네가 환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피해 다니든 말든 때가 되면 꽃은 사정없이 핀다. 꽃은 사람에게 겁먹지 않는다. 사랑하지도 않는다. 저 자신으로 꽃일 뿐, 저들도 병들고 아플 때가 있겠지만 꽃은 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얼굴을 가리고 벌 받은 것처럼 조용한 여름 백일홍 꽃숭어리들이 바이러스처럼 붉다.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 복날 생각 혹은 다리 밑 - 이상국 아직도 복(伏)이 되면 다리 밑이 그립다. 어렸을 적 같으면 동네 사람들과 똥개 한마리 앞세우고 솥단지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곳 지금은 고향에도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 이제 개 추렴 같은 건 너무 촌스럽고 또 반문화적인데다가 다리도 차가 지나가면 무..

한줄 詩 2021.07.12

승화원에서 - 손병걸

승화원에서 - 손병걸 서해가 빤히 보이는 모텔에서 발견된 막노동꾼 동생이 누운 목관이 입술을 앙다문 형제자매들을 지나 화구 속 불길로 빨려 들어간다 죽음의 완결을 호명하는 전광판 숫자만큼 승화원 창밖에도 어제의 일몰을 닮은 흰 구름들 다시 한껏 붉은데 돛대도 삿대도 없이 머나먼 길을 나선 동생은 어떻게 아침을 맞이할까 뜨거운 뼛가루 손에 움켜쥔 채 형제자매들 차마 손을 펴지 못하고 분향소 곁 계수나무 위 새들도 가느다란 가지를 꽉 움켜쥔 채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높고 긴 굴뚝 위로 굵은 연기가 망망한 허공에 길 한 가닥을 놓아줄 때 그제야 노을빛 눈동자들 하나둘 입을 모아 즐겨 부르던 동생의 노래 가사를 밤하늘 한복판에 마디마디 새긴다 일렁이는 소절들 범람하듯 환하게 흐른다 하얀 쪽배에 동생을 싣..

한줄 詩 2021.07.11

시큰거린 이유 - 손석호

시큰거린 이유 - 손석호 콧등에 기댄 안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릴 때, 문득 내 풍경이 누군가에게 등을 기대고 있는 것 같아 살며시 눈이 감겼다 언젠가부터 앙상한 풍경 속에 당신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 억지로 기억해 낸 체취에 기대어 잠들곤 했는데 빗소리에 놀라 눈뜨면 체취는 항상 말끔하게 씻겨져 있었다 장마의 밤이었다 체취가 젖지 않게 마음속에 코를 닮은 오두막을 짓고 창을 활짝 열어 놓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아 창밖으로 목을 빼내 킁킁거렸다 콧등으로 빗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파란출판 구속 - 손석호 고3이던 그해 늦은 사춘기가 찾아왔고 논을 갈던 우리 집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다 촌에서 공부 좀 한다고 읍내에서 하숙까지 시켰지만 송아지가 걸음마를 배울..

한줄 詩 2021.07.08

하울링 - 김륭

하울링 - 김륭 참 신기하지 혼자 먹는 라면 한 그릇 파르르 손이 떨릴 만한 그런 일 같기도 한데 면발 한 줄 흘리지 않고 비우는, 어느 여름날엔 양은냄비 가득 빗줄기 담아 와서는 병뚜껑보다 작게 오므린 그 입 좀 열어보라고 이런 게 빛이라고, 빛보다 목이 길어진 영혼의 보푸라기라고 몽실몽실 수줍게 늙은 너구리처럼 말한 것도 같은데 면발 한 줄 흘리지 않는 라면 한 그릇, 내가 모아두었던 네 목소리 한 그릇 물끄러미 15층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고양이처럼, 발소리 죽이고 걸었던 어느 구름 속에서는 지금쯤 비가 일어서는 중이겠지만, 참 애가 타 너무 길어서 다시 쓸 수 없는 한 줄 쓰지 못해 지울 수도 없는 한 줄 흥건하게 내가 나에게 무슨 일인가를 저지른 것 같은데 면발 한 줄 흘리지 않고 바닥을 비..

한줄 詩 2021.07.08

간결한 자세 - 정선희

간결한 자세 - 정선희 하늘이 맑아 한바탕 잘 울었다 날카로운 햇살에 옆구리를 찔린 난간이 드러났다 비로소 난간의 방치된 만큼 공손해진 그늘을 본다 가계부에서 해석할 수 없는 슬픔의 구석을 지우고 밤과 낮의 궤도를 돌아온 뒷걸음의 목록을 다시 쓴다 사거리에서 몇 십 년째 목격자의 행방을 묻는 바람은 여전히 흩어지는 플래카드의 윤곽을 붙잡는다 수직으로 움직이는 편향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들의 세상은 오른쪽과 왼쪽을 조율한다 오른쪽을 맞추면 왼쪽이 왼쪽을 맞추면 오른쪽이 문득문득, 운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우리들의 인당 - 정선희 대나무 꽂힌 집에 가면 인당의 밝기를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을 혹은 꽃이 떨어지는 방향을 알아맞힌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그곳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

한줄 詩 2021.07.07

눈물 혹은 장마 - 피재현

눈물 혹은 장마 - 피재현 한 줌의 바람이 불어 왔다 장마 중이었다 한 뼘의 비가 바람 속에 들어 있다 다행이 장마 중이었다 눈물을 뚝 뚝 떼어 -마치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수제비 반죽을 떼어 던지듯이- 허공 중에 던졌다 이제 공복의 허기를 채우고 일 하러 가리라 차양으로 가려진 하늘을 힐끗 쳐다보는 순간 수제비처럼 생긴 새들이 수직상승하고 있다 날개의 더운 물기를 허공 중에 털어냈다 장마 중이었다 다행히 장마 중이었다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내가 지상에서 - 피재현 때묻은 옷을 빨아 말리며 유월의 볕이란 참 대단한 정열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바람 한 점 도움 없이 천공의 물기를 빨아 뱉어내는 흡입의 힘이란 내가 지상에 살면서 때로 우체국이나 기상관측대의 옥상에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 싶어 했..

한줄 詩 2021.07.06

자두 - 김유미

자두 - 김유미 어디서부터 붉어졌을까 식구들은 돌아오지 않고 그림자는 서쪽까지 자라난다 문을 사이에 두고 아이는 모자를 잠재우고 새는 구름의 모서리를 파헤친다 노을이 제 눈의 혈관을 가리킬 때 어둠은 아이의 눈물 자국을 닦는다 자두라는 관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 전해지는 맛들 제 발길에 걸려 넘어지는 고양이의 울음, 이물감을 쏟아 내는 수도, 나뭇가지에 걸린 다문 입, 인형의 머리에서 빗질되는 허공 구구단을 외울 때 불어난 틈들이 바람의 처마 아래에 쌓인다 닫을 때 포옹하고 열 때 경고하는 것처럼 삐걱대는 소리는 오래된 정의 울음을 삼키면 물러지는 나무가 생겼다 온몸이 붉어지는 생들이 세상의 뒷문에서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동안 저녁은 길을 잃은 자들의 숨결로 ..

한줄 詩 2021.07.06

당신의 바깥 - 권상진

당신의 바깥 - 권상진 자기가 삼킨 눈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안다 딱 그의 키만큼 울고 갔다 염장이가 그를 슬픔과 함께 단단히 묶고 눈물이 새 나가지 않도록 오동나무 관으로 경계를 두르는 동안 죽음을 빙 둘러선 사람들은 그에게 흘러든 어떤 구름에 대해 증언하거나 자신의 몸에 눈금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막잔을 비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코끝까지 차오른 눈물에 그가 술잔처럼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바깥에 서 있었다 울고 있었지만 아무도 당신이 술잔에 채워 준 구름을 마시지 않았다 한 이틀 슬픔들이 속속 다녀가고 마지막 날엔 잘게 부서진 눈물이 항아리에 고였다 주목나무 아래 그를 뿌려 두고 남은 이들이 출렁거리면서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합동시집/ 시골시인-K /..

한줄 詩 2021.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