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거문도에서 - 이형권

거문도에서 - 이형권 겨우내 바다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거친 파도가 밀려드는 수평선 너머 저 혼자 장판지 같은 하루를 접었다 펼쳤다 바다는 속절없는 날들이 얼마나 쓸쓸하였을까요 바람 부는 모퉁이 벼랑길을 돌아서면 한겨울 매서운 해풍 속에서 앓던 열병을 동백꽃은 알고 있지요 그래서 잎새마다 선연하게 피꽃을 피워낸 것이지요 거역할 수 없는 운명만이 오직 붉은 가슴으로 피어나 겨울 바다의 쓸쓸함을 연모했을 뿐 지난 세월을 말해 무엇하리오 남풍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명주실 같은 봄빛이 반짝이고 어느덧 사랑과 이별의 경계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의 길들이 저녁노을처럼 아득해지고 보이지 않던 추억들이 뚜렷해지는 시간 홀로 그대의 열망을 사랑했던 날들만이 남았습니다 손 내밀어도 닿지 않을 변방의 극지에서 찬란한 애모 빛깔로..

한줄 詩 2021.07.29

자수 혹은 고백 - 피재현

자수 혹은 고백 - 피재현 할머니 돌아가신 날 할머니의 쌈지를 훔쳤다 할머니는 가끔 그 쌈지를 열어 나에게 용돈을 주셨다 고쟁이 속에 손을 넣어 쌈지를 꺼내면 퇴계선생 하얀 심의(深衣) 차림으로 오솔길 걸어 나왔지만 주머니 속에는 세종대왕 우글거릴 것 같았던 매혹적인 주머니 두근거리는 가슴 닫아걸고 뒤안 정짓문 아래 쪼그려 앉아 열어 본 주머니에는 부적 한 장, 호박단추 둘, 내 중학교 교복에 붙었던 명찰 하나 들어 있었다 세종대왕은 어디로 몽진(蒙塵) 가시고 없고 퇴계선생 낯익다는 듯 내 행실을 꾸짖었다 그날 나는 할머니와 사별이 슬펐던지 앙꼬 없는 찐빵을 가른 것 같은 서운함 때문인지 엉엉 서럽게 많이도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문상 온 사람들은 참 대견한 손주라고 그랬다 제사 때마다 엎드려 30년을 ..

한줄 詩 2021.07.29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 박순호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 박순호 헝겊인형 가슴을 훔친 솜뭉치에서 선반을 주저앉힌 녹슨 볼트에서 애타게 사람을 찾는 전단지에서 종이 결을 모르는 잉크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우스 표현할 줄 모르는 고장 난 턴테이블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삼킬 때 알아볼 수 없는 필체에서 곰팡이 핀 식빵에서 벽장에 갇힌 꽃병에서 세월을 갉아먹는 서까래 부러진 목발 너는 우울을 생산하는 공장에 나를 취직시킨다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구멍 - 박순호 -블루홀 깨울 수 없는 잠 빛이 도달하지 못하게 주먹 모양을 한 덩어리진 전설 벌어진 틈으로 속삭이는 공명음 들리는가 여기로 와서 나를 열어보겠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기심 많은 당신의 몫 나는 부지런히 눈치를 보며 퍼즐을 맞춘다 몸의 질문은 부자연스럽다 ..

한줄 詩 2021.07.28

저곳 - 임성용

저곳 - 임성용 누구든 저곳에 올라갈 때 내려갈 생각을 하고 올라간 것은 아니라네 한 발 한 발 허공을 오르는 힘은 오로지 마지막 남은 떨림뿐이라네 저곳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이 태어난 곳 밤과 낮 해와 달이 말라가는 곳 저곳 벌거숭이 하늘에서 내려가도 편안히 발 딛을 땅 찾지 않으려네 저 높은 곳 한 사람이 사는 곳 저 높은 곳 한 사람이 죽은 곳 또 누가 평생을 다해 또 누가 목숨을 다해 *시집/ 흐린 저녁의 말들/ 반걸음 흐린 저녁의 말들 - 임성용 따뜻한 눈빛만 기억해야 하는데 경멸스런 눈빛만 오래도록 남았네 얼크러진 세월이 지나가고 근거 없는 절망 우울한 거짓말이 쌓이고 나는 그 말을 믿네 가난하고 고독한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네 진짜 슬픈 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용기도 헌신도 잃어버..

한줄 詩 2021.07.28

무덤은 철학가 - 이자규

무덤은 철학가 - 이자규 비명에 간 비명이 비를 세웠다면 그런 증후군은 나를 헤치울 것이다 천만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저 무덤은 제 몸이 낮아졌을 것이다 슬리퍼나 비닐들이 버린 나는 헌옷 수거함 속의 나다 비는 내리고 도심 한복판의 무덤가 비석인 내가 불안하게 비스듬히 서 있다 저것은 새벽 태공들 구름과자 연신 헤아리는 동리 개구장이 놀이터, 화강암 상석에 깔린 지린내와 꽁초의 기억으로 공중을 세웠을 터 세도가의 비문은 흐린 날씨 덕에 한껏 눈물 흘린다 오늘은 설날, 성묘 가는 모습들 아침부터 지켜보던 무덤은 마침내 소리 지른다 '차라리 이름이나 지우고 갈 일이지' 이민 간 그 자손들 저 소리 들릴까, 처연하고도 싸늘한 표정의 무덤은 꽃과 바람과 강물을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지자 깊어갈수록 별들만 읽어내는..

한줄 詩 2021.07.27

내가 모르는 너의 슬픔은 - 이용호

내가 모르는 너의 슬픔은 - 이용호 관자놀이를 통과해 간 눈물들 모두 너의 영혼을 감싸고 있는 그늘 아마 영점 일 밀리그램도 안 되는 탄소와 나트륨과 질소쯤 될 거야 내가 모르는 성분의 네 눈물이 떨어져 내릴 때 내가 모르는 네 한숨이 내 어깨 위에서 울고 있을 때 이 세상은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 햇살이 내 안에 식민지로 내려앉을 땐 더 이상 슬플 게 없을 짐승들마저 최후의 고백 속으로 숨어 버리는 날이 오겠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들도 무심하게 바다로만 침몰해 갔으니 슬픔이 비껴갈 땐 한 발 물러서서 모서리로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바라볼 것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저절로 침묵하는 건 없을 테니까 스스로 자취를 지운 저 지평선에서 누군가 스치듯 지나쳐 갈 때 꼭 눈물의 성분으로 닳아가는 ..

한줄 詩 2021.07.26

사랑이란 - 김익진

사랑이란 - 김익진 사랑은 탐험될 수 없는 은하 별들 속에 반짝이는 별 빈 공간에 가득한 어둠처럼 보이지 않으나 실재한다 우주의 무한한 팽창처럼 영혼은 원자의 불확실성 사랑은 어쩌면 일시적인 융합 후 긴 분해의 표류다 사랑의 본질은 알 수 없는 심연 영혼을 찾아가는 길 위에는 언제나 눈비가 내리고 녹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잃어버린 후 힘들어하면 사랑이라 한다 자유로웠던 마음이 과거에 잡혀 있고 안개 속 헤드라이트를 보고 고양이처럼 두리번거리면 사랑이라 한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새벽을 바라보면 누군가 사랑이라 의심하고 살아있음으로 충분한데 무중력의 영혼을 잡으려 하면 그것은 분명 사랑이다 사랑은 반드시 담론의 대상이 있고 구체적이다 그리하여 사랑이란 정교하지만 보이지 않는 소비의 밤 방문을 걸어 잠그고 ..

한줄 詩 2021.07.22

얼굴을 쉬다 - 김나영

얼굴을 쉬다 - 김나영 한 사흘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얼굴에서 해방된다 내 얼굴이 내 얼굴이 된다 타인의 시선이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얼굴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보이고 싶은 나와 보이지 나는 한 번도 일치하지 않는다 얼굴은 붉고 물컹한 낭떠러지 근엄한 표정 무서운 표정 다정한 표정을 장소에 따라 화장과 분장으로 덧칠하며 무기처럼 사용한다 이틀 만에 세수를 했다 해골과 가죽과 살만 오롯이 잡히는 내 얼굴을 오랫동안 씻고 또 씻었다 혹시라도 남아 있는 타인의 시선을 내 얼굴로 함부로 횡단하던 타인의 흔적을 씻고 또 씻어 냈다 나는 곧 외출을 할 것이다 독자의 손으로 넘어간 내 작품처럼 내 얼굴은 곧 금이 가고 해체되고 해석되어 왜곡될 것이다 나는 또 얼굴을 팔러..

한줄 詩 2021.07.22

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 서윤후

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 서윤후 폐허에 다녀온 뒤로 나는 범벅이다 아름다웠던 세상에 대해 회고할 준비를 끝마친 싸움들의 혼종 어떤 기억은 장난감 기차를 타고 간다 선로에 누워 잠들었던 이는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 하고는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 폐허를 떠나온 뒤로 그 주소는 자꾸 선명해져만 간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이 장난감 기차를 타고 떠난다 손을 흔들자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범벅이 되어 하나씩 지워간다 그러면 살 것 같았다 얼룩을 주인에게 돌려주려다가 간직하게 된다 사랑으로 생긴 무늬는 언제나 형편없이 굴고 끝나지 않기 위해 반복되는 풀벌레의 노래 개울의 첨벙거림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나는 범벅 가를 수 없는 슬픔의 혼혈 서로를 끌어안다가 가녀린 얼굴을 어깨에 포개고는 헤어지지 말자..

한줄 詩 2021.07.21

흙수저 - 이산하

흙수저 - 이산하 자본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한 사람이 쪽박이고 신자유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열 사람이 쪽박이다. 어느날 한강에 투신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남자가 자기를 극적으로 건져낸 구조대원에게 억울한 듯 항의했다. "사고 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해? 당신이 앞으로 내 인생 책임질 거야?" "....." "흙수저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 되는 세상이란 걸 알면서 왜 무책임하게 구하냔 말이야!" "....." "대신 살아주지도 못하고 대신 아파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젊은 구조대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묵묵히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목숨을 구했지만 이날 문득 처음으로 자신이 그들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

한줄 詩 2021.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