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간결한 자세 - 정선희

마루안 2021. 7. 7. 22:08

 

 

간결한 자세 - 정선희


하늘이 맑아 한바탕 잘 울었다

날카로운 햇살에 옆구리를 찔린 난간이 드러났다
비로소 난간의 방치된 만큼 공손해진 그늘을 본다

가계부에서 해석할 수 없는 슬픔의 구석을 지우고
밤과 낮의 궤도를 돌아온 뒷걸음의 목록을 다시 쓴다

사거리에서 몇 십 년째 목격자의 행방을 묻는 바람은
여전히 흩어지는 플래카드의 윤곽을 붙잡는다
수직으로 움직이는 편향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들의 세상은 오른쪽과 왼쪽을 조율한다

오른쪽을 맞추면 왼쪽이 왼쪽을 맞추면 오른쪽이
문득문득, 운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우리들의 인당 - 정선희


대나무 꽂힌 집에 가면 
인당의 밝기를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을
혹은 꽃이 떨어지는 방향을
알아맞힌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그곳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곳의
천(川)은 근심도 걱정도 의무감처럼 일렁였다

걱정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았던 어머니
걱정이 없으면 남의 걱정을 사서 하시던 어머니
걱정을 안주 삼아 장단을 치고
술 섞인 이야기 끝을 눈물로 적시던 어머니

그 물길은 어머니의 걱정을 지나
내게 흘러들었다
아침마다 자고 일어난 자리가 축축하다

인당수는 서쪽 바다를 지나
양미간 사이로 흘러들어서

낮잠에 잠깐 걱정을 내려놓은 어머니가 된다
이마에 川 무늬 아름답게도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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