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원에서 - 손병걸
서해가 빤히 보이는 모텔에서 발견된
막노동꾼 동생이 누운 목관이
입술을 앙다문 형제자매들을 지나
화구 속 불길로 빨려 들어간다
죽음의 완결을 호명하는 전광판 숫자만큼
승화원 창밖에도 어제의 일몰을 닮은
흰 구름들 다시 한껏 붉은데
돛대도 삿대도 없이 머나먼 길을 나선
동생은 어떻게 아침을 맞이할까
뜨거운 뼛가루 손에 움켜쥔 채
형제자매들 차마 손을 펴지 못하고
분향소 곁 계수나무 위 새들도
가느다란 가지를 꽉 움켜쥔 채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높고 긴 굴뚝 위로 굵은 연기가
망망한 허공에 길 한 가닥을 놓아줄 때
그제야 노을빛 눈동자들 하나둘 입을 모아
즐겨 부르던 동생의 노래 가사를
밤하늘 한복판에 마디마디 새긴다
일렁이는 소절들 범람하듯 환하게
흐른다 하얀 쪽배에 동생을 싣고
바알간 해 앞서간 수평선을 향해
흐른다 푸른 하늘 은하수 서쪽 나라로
*시집/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걷는사람
강 - 손병걸
남자가 취했다
궁싯궁싯 여자의 몇 마디에
와지끈 밥상이 엎어졌다
튀어 오른 숟가락 젓가락이
잠든 척 누운 아이 얼굴에 떨어졌다
남자는 또 방에 갇혔다
풀벌레 울음소리 뒤엉키는 강둑에서
여자의 치맛자락이 아이의 이불이 되고
강 건너 하늘 별들 틈에서
별 하나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여자는 두 눈빛을 반짝이며
재빨리 강물에 손을 담갔고
여자 손에 건져진 별 하나가
아이 머리카락 속에 깊숙이 감춰졌다
찬바람은 아랑곳없이 아이를 지르밟고
밤새 뭉치 바람을 밀어내며
한껏 붉어진 여자의 두 눈이
막 잠을 깬 아이 눈과 마주할 때
강둑 아래 키가 큰 갈대숲에서
새 한 무리 후두두 날아오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강물 속에서
눈부신 금빛 햇살이 일렁일렁 일었다
*시인의 말
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이 모여드는 곳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작은 공간
원자, 분자, 고체, 액체, 기체도 아닌
성분을 모를 기억들이 쌓인 저장고
죽는 날까지 가득히 채울 수 없는
고작 타원의 공간 속 한편을 차지한
설렘, 희열, 슬픔, 분노, 그 긴장과 전율
그래서 다시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멈춤 없이 접속사를 생성할 때마다
다음 문장들을 아예 툭, 툭, 끊어 버리는
투명한 허공 속 가득 찬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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