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선천적 우울 - 박순호

마루안 2021. 7. 15. 19:32

 

 

선천적 우울 - 박순호


자궁 안에서는 우울마저 따듯했다라고
아직 영글지 못한 그늘
아늑했다라고
쓴,
작위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근황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양수가 터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것이
핏줄을 붙잡고 기웃거릴 거라고
내가 가진 높이를 휘감아 오를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행성을 닮았다는 천문학자의 말
외계생물 같다는 과학자의 말
뿔 달린 귀신이라는 무당의 말
강박증이 가지를 쳤다는 심리학자의 말

그러나
나는 충분히 우울했으므로
주석 따위는 달지 않았다

까마귀가 앉았다 떠난 나뭇가지
검은 깃털이 걸려 있다
우울을 가꾸던
검은 사제
검은 사체들

두서없이 쌓이는 저 막막함!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애도하는 삶 - 박순호

 

 

물 위에 쓴 일기는 멀리 멀리 뒷걸음질 친다

앞과 뒤가 섞이고

문장부호들이 뒤죽박죽 흐물거리고

지금 이 순간도 출렁거려서 멀미가 날 지경이다

 

마구 짓밟고, 부수고

잊힌 것들까지 끄집어내어 닦달한다

더 이상 죽는 시늉도 먹히지 않는다

 

완벽한 하루를 증명하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다

 

삶의 찬사는 차갑고 맵다

 

기이한  하루를 버텨낸다면,

몸뚱이는 검은 섬에 놓아두고

눈과 귀를 데리고 심해로 가라앉은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좋아질 거예요

한 이불 속에서 나지막이 퍼지는 속삭임도 잠시

기쁨을 겨냥한 화살은 빗나간다

 

나는 내게 의미 있는 것들에 대한 상실을 애도한다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기를 원한다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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