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두 - 김유미

마루안 2021. 7. 6. 21:33

 

 

자두 - 김유미

 

 

어디서부터 붉어졌을까

 

식구들은 돌아오지 않고 그림자는 서쪽까지 자라난다

문을 사이에 두고

아이는 모자를 잠재우고

새는 구름의 모서리를 파헤친다

노을이 제 눈의 혈관을 가리킬 때

어둠은 아이의 눈물 자국을 닦는다

 

자두라는 관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 전해지는 맛들

제 발길에 걸려 넘어지는 고양이의 울음, 이물감을 쏟아 내는 수도, 나뭇가지에 걸린 다문 입, 인형의 머리에서 빗질되는 허공

 

구구단을 외울 때 불어난 틈들이

바람의 처마 아래에 쌓인다

 

닫을 때 포옹하고 열 때 경고하는 것처럼

삐걱대는 소리는 오래된 정의

 

울음을 삼키면 물러지는 나무가 생겼다

 

온몸이 붉어지는 생들이

세상의 뒷문에서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동안

저녁은 길을 잃은 자들의 숨결로

문밖을 배회했다

 

 

*시집/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파란출판

 

 

 

 

 

 

극야 - 김유미

 

 

지하를 벗겨 내고 창을 닦고 싶어지면

팔목은 늘 외곽의 이정표처럼 헐거워진다

 

한 그릇에 담겨 있는 색깔이 되어

단칸에 나란히 누운 동생들은 열다섯 살, 열세 살

 

동생들의 말이 띄엄띄엄해지는 사이에도

웃어 주는 눈사람, 웃어 주는 쪽창, 웃어 주는 밥솥, 웃어 주는 거울, 웃어 주는 인형

 

극지에는

벽 속에서 걸어 나온 새까만 한낮,

새들이 얼어 버린 발목을 콕콕 찍으면 빛들이 흘러내린다는

구전이 있다

 

이곳에서 반짝이는 눈을 가진 것은

밖과 안을 묘사하고 있는 쪽창이라는 기관

한 명 두 명 세 명.....

 

우리는 밤하늘의 새로운 은하계로 발견되었다

 

두고두고 서랍으로 기록될 범위

느리게 진행되는 밀실의 공기가

되풀이되고 있는

 

 

 

 

# 김유미 시인은 전남 신안 출생으로 2014년 <시와 반시>로 등단했다.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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