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 서윤후

마루안 2021. 7. 21. 22:08

 

 

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 서윤후


폐허에 다녀온 뒤로
나는 범벅이다
아름다웠던 세상에 대해 회고할 준비를 끝마친
싸움들의 혼종

어떤 기억은 장난감 기차를 타고 간다
선로에 누워 잠들었던 이는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
하고는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

폐허를 떠나온 뒤로
그 주소는 자꾸 선명해져만 간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이
장난감 기차를 타고 떠난다
손을 흔들자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범벅이 되어 하나씩 지워간다
그러면 살 것 같았다
얼룩을 주인에게 돌려주려다가
간직하게 된다
사랑으로 생긴 무늬는
언제나 형편없이 굴고

끝나지 않기 위해 반복되는
풀벌레의 노래
개울의 첨벙거림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나는 범벅
가를 수 없는 슬픔의 혼혈

서로를 끌어안다가
가녀린 얼굴을 어깨에 포개고는
헤어지지 말자고 말하던
그 사람은 아직도 선로에 누워 있다
나는 그에게 뭐라도 묻힐까봐
범벅된 내 손 건넬 수 없고

잠깐만 자는 잠이라도 좋으니
장난감 기차는 멀리 흘러가거라
풀벌레 실컷 우는 저녁 속으로 들어가
사랑은 계속 뒤석일 테니
가장 아름다운 범벅이 될 테니

*시집/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누가 되는 슬픔 - 서윤후 


슬픔에게서 재주가 늘어나는 것 같아 
 
녹슨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을 글썽거린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 망설이던 말이 발을 절며 다가와 매일 낭떠러지에 있다고 나를 종용하고 
 
이제 등에 몰두하자는 말을 했지 두 눈동자의 주름을 펼치며 바라보자고 했지 그러나 너무 많은 슬픔이 기성품이 되어 집에 돌아온다 누구나 붙잡고 말하게 되는
 
마른 헝겊이 모자란 세계로 출국하고 바닷바람 머금은 손수건을 선물하지 이 모르는 슬픔이 움직이는 이유를 잠깐 떠들고 싶다 비행운의 연기력처럼 
 
포로의 잠꼬대를 닮은 위로만 해댔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슬픔은 등에 업고 가려고 해 그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헤멜수록 정확해지는 그 주소로 향하려고 해 
 
슬픔의 묘기가 나를 흉내낸다 눈물을 훔치던 네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었는지 되묻고, 나는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간청한다 슬픔이 이렇게 반복된다면

 

 

 

 

# 서윤후 시인은 1990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9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가 있다. 2018년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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