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모르는 너의 슬픔은 - 이용호

마루안 2021. 7. 26. 19:40

 

 

내가 모르는 너의 슬픔은 - 이용호

 

 

관자놀이를 통과해 간 눈물들 모두

너의 영혼을 감싸고 있는 그늘

아마 영점 일 밀리그램도 안 되는

탄소와 나트륨과 질소쯤 될 거야

내가 모르는 성분의 네 눈물이 떨어져 내릴 때

내가 모르는 네 한숨이 내 어깨 위에서 울고 있을 때

이 세상은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

햇살이 내 안에 식민지로 내려앉을 땐

더 이상 슬플 게 없을 짐승들마저

최후의 고백 속으로 숨어 버리는 날이 오겠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들도

무심하게 바다로만 침몰해 갔으니

슬픔이 비껴갈 땐 한 발 물러서서

모서리로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바라볼 것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저절로 침묵하는 건 없을 테니까

스스로 자취를 지운 저 지평선에서

누군가 스치듯 지나쳐 갈 때

꼭 눈물의 성분으로 닳아가는 걱정마저

갚을 수 없는 빚으로 남아 있더라도 말이야

아쉽지만 잊어야 한다는 것도

잊으므로 다시 채워질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모르는 너의 슬픔이

스스로 자취를 지울 수 있을 때까지만

 

 

*시집/ 팔순의 어머니께서 아들의 시집을 읽으시네/ 실천문학사

 

 

 

 

 

 

장의사(葬儀社) - 이용호

 

 

그땐 왜 그랬는지 몰랐다

내게로 오는 모든 것들은 하나씩 사연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와서야 비로소 온순해지고

누군가는 이곳에 와서야 한 생애를 하루처럼 마감했다

 

삶은 내려놓을 때에야 결국엔 저녁의 허기처럼 가벼워졌다

땅에 순응하고 자세를 낮출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하나 둘 모여 저 조등을 만들 테니까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게는 아름다운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움직이지 않은 것들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크게 한 번 내쉬었다가는 이내

내게로 와서야 고요한 사물이 되었다

 

귀퉁이가 조금씩 떨어져 나간 것들은

구석에서 몸을 추스리며 조금은 울먹이고 있었다

마음을 다친 자들의 신념이 노을이 되고

이어서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을 때

누군가 첫 울음을 용기 있게 내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것들은 무릎이 부어 있었다

하얀 관절이 정처 없이 빠져 나가는 부위를 감싸며

이제야 돌기 시작하는 혈액의 온기에 내일을 맡길 때였다

 

저토록 치명적인 순간의 질서들

장의사 사무실 뒤쪽으로 어슴프레 지친 아침이

흐느끼며 흐느끼다 적멸에 들고 있었다

 

 

 

 

 

*시인의 말

 

내 시는

고독한 식민지의 애국가

그대에게 바치는 이 세상의 마지막 헌사

차마 말하지 못했던 고백쯤 될까

 

내게 온 모든 것들은

이제 낡아 가고

조금씩 늙어 간다

 

내 시가

그대의 허물어진 뒷모습을 감쌀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그대에게

온기 가득한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이제 팔십의 고개를 넘어가고 계신

나의 영원한

늙어가는 옛 애인인

어머니께 이 시집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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