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덤은 철학가 - 이자규

마루안 2021. 7. 27. 22:15

 

 

무덤은 철학가 - 이자규

 

 

비명에 간 비명이 비를 세웠다면 그런 증후군은 나를 헤치울 것이다

 

천만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저 무덤은 제 몸이 낮아졌을 것이다

 

슬리퍼나 비닐들이 버린 나는 헌옷 수거함 속의 나다 비는 내리고 도심 한복판의 무덤가 비석인 내가 불안하게 비스듬히 서 있다

 

저것은 새벽 태공들 구름과자 연신 헤아리는 동리 개구장이 놀이터, 화강암 상석에 깔린 지린내와 꽁초의 기억으로 공중을 세웠을 터

 

세도가의 비문은 흐린 날씨 덕에 한껏 눈물 흘린다 오늘은 설날, 성묘 가는 모습들 아침부터 지켜보던 무덤은 마침내 소리 지른다

'차라리 이름이나 지우고 갈 일이지'

이민 간 그 자손들 저 소리 들릴까, 처연하고도 싸늘한 표정의 무덤은 꽃과 바람과 강물을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지자 깊어갈수록 별들만 읽어내는 물상세계, 쌓여가는 폐비닐 플라스틱이 함께 귀를 열었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필름을 풀다 - 이자규

 

 

장롱 깊숙이에서 찬란한 수저 주머니가 나왔다

메두사의 눈을 한 붉은 여왕이다 철기시대 노인의 낡은 판도라 상자다

내 손이 붉은 화원으로 들어갔다 찔레와 동백이 서로 안고 핀 가지 끝이 떨렸다

원앙의 부리가 한 생의 전언이기에 나는 흠뻑 젖어 녹슨 영사기를 돌렸다

증조할머니가 그냥 지나쳤다

내 손바닥엔 일백 번 달이 기울고 졌을 시간

 

구순의 백발 소녀 앞에 무릎 꿇고 흐느꼈던 사람

암 투병 중인 팔순의 시동생이 임종을 앞두고 큰절 올리는 모습

비단에 수놓은 수젓집과 검은 사각모

배경음악이 투명하게 흔들렸다면 이것은 영화본이 맞다

 

한땀 한땀 꽃잎 매달 때마다 핏발 세웠을 새벽닭으로

글 읽는 보릿고개가 있었다고

손때 굳은 수틀은 제 몸이 닳아빠지도록 또 얼마나 휘청했을까,

없는 수틀 속에서 자라난 근성이 커다란 그늘을 부리고 있다

나는 지금 상영 중이다

 

 

 

 

 

*시인의 말

 

발칙하고 비린내 나는 진창의 살과 뼈

내 몸을 통과한 시를 쓰고 싶었다

 

구걸이고 기도이면서 私娼인 존재형식의 노래

살아 있는 쓰레기더미를 쓰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마음 나누고 싶은 페르세포네의 방

재활의 시를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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