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물망초 - 윤의섭

마루안 2021. 9. 18. 19:33

 

 

물망초 - 윤의섭

 

 

제자리에 떠 있는 새는 바람과 맞서는 중이다

다른 항로는 없다

새는 지금 충분히 무겁다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입니다 물망초

우리 일생이 그런 거죠

안 그러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얘기를 들으면서 한참을 머물렀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나에 대한 기억이 쌓이는 건지

희미해지는 건지

언제부터 이 산책을 나섰는지 떠오르지 않아

깨고 나면 잊힐 게 분명한 생시였다

지난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펼쳐졌으므로

 

구릉으로부터 바람이 밀려온다

나무들의 지붕이 쓸리고 뒤따라 노을구름과의 꼬리가 흩어진다

 

걷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이 생이란

 

지워지지 않은 네 생각들로 가볍지 않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애사 - 윤의섭


내가 꾸는 가장 긴 꿈은 너와의 일초에 대해서일 것이다
그 순간 너는 무한대의 집을 지은 것이다 오늘은 남은 삶의 첫날이라며
사소한 선택일 뿐이라고 했지만 바깥은 없고 내부만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 때였다
어떤 종말론적인 말이 발음되는 시간은 일초도 걸리지 않는다
죽어버려 미친 끝이야 세상이란 넌 그래서 그래서 아파 사랑해
이제 이초와 삼초로 이어지지 않는 가장 폐쇄적인 일초에 대해 궁리할 수 있다

무엇이 나였던가요
저 꽃 저 달 아니면 저 무수한 죽음

잘못된 질문이에요
나는 단지 별을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대답을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영원이 알 수 없는 건 스스로의 시간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 별은 자신을 불태우는 중입니다
초신성 상태를 넘어서면 일초도 안 되는 사이에 별의 씨앗을 뿌리도록 운명지어진
별이란 원래 외로운 종족입니다
별에게 종말은 외로움의 또 다른 증식입니다

일초 만의 붕괴 일초 만의 완결 일초 만의 극단 일초 만의 시말 일초 만의 영겁
말하자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있다

내가 꾸는 가장 긴 꿈은 너에 대해서일 것이다
꿈자리는 향기로운 꽃밭을 넘나드는 나비처럼 별자리를 오가는 네가 은닉하기로 한 집이어서
나는 깰 수 없다
죽었다면 더는 죽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