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추석을 배달하는 퀵서비스 맨 - 주창윤

마루안 2021. 9. 22. 19:23

 

 

추석을 배달하는 퀵서비스 맨 - 주창윤

 

 

배달이 밀리는 추석이다.

퀵서비스 맨이 갈비 세트와 특상(特上) 나주배 상자와

양주병을 가득 싣고

질주한다.

그의 어깨 너머 추석 보름달이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와 짓누른다.

특상 나주배 같은 달의 무게가

중심을 잃게 만들었나?

사거리에서 넘어진 오토바이

바퀴는 계속해서 헛돌고

쓰러진 퀵서비스 맨은 일어나지 못한다.

깨진 양주병에서

터진 보름달이 흘러내려

아스팔트를 적신다.

달은 그렇게 노랗게 흘러내리고 있다.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그리운 은하수 목욕탕 - 주창윤

 

 

중계동 한화꿈에그린 아파트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걸어가면

빌라와 주택들 사이

은하수 목욕탕이 있다.

몇 달 만에 갔더니 사라졌다.

 

격포에 가서,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낸

해안 절벽의 층층이 쌓인, 시간들이

만들어 낸 질서 앞으로 내려갔다.

퇴적의 아름다움이었다.

퇴적층 겹겹이 공룡의 발자국도

오래전 떨어진 별들과

그 위를 덮고 있는 달빛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고

파도가 씻어내고 있었다.

 

은하수 목욕탕 할머니가

건네주는 티켓을 갖고 들어가서

은하수의 한가운데 나 홀로

눕고 싶었는데

시간은 구부러져 있다.

 

그리운 은하수 목욕탕

시설은 허름해도

물 맑은 곳.

 

 

 

 

# 주창윤 시인은 1963년 대전 출생으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 위를 걷는 자 물 밑을 걷는 자>, <옷걸이에 걸린 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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