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화상 - 황중하

마루안 2021. 9. 19. 21:35

 

 

자화상 - 황중하

 

나는 불행했고 불행하고 또 불행하다.


내가 그린 나의 얼굴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러 겹 덧대어 그린 불안한 선들과
우울한 형태들

내가 믿고 싶은 진실은
언제나 스케치의 뒷면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황홀한 진실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를 향해 열려 있지만
늘 깜깜했다.

어둠 속에 추락한다.
상처 입은 채 깨어난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며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도화지 속 나의 얼굴

그것은 내가 그린 타인의 거짓말

처음부터 나의 불행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시집/ 나는 아직 당신을 처리중입니다/ 문학의전당

 

 

 

 

 

 

빗방울 - 황중하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칼날 같은 빗방울은 내리고

나의 뇌리에 뚫고 들어오는 빗방울의 생각들

나의 자궁까지 쳐들어오는

칼날 같은 생각들

 

알코올도 수면제도 없이

그 어떤 치명적인 무기도 없이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

무엇으로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오염된 빗줄기가 내리고

꽃도 나뭇잎도 빗방울에 젖는다

 

나는 하염없이 추락하는 빗방울

마침내 바닥까지 닿아 온몸이 골절되는 빗방울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피와 식은땀으로 얼룩진 밤

 

오염된 빗방울의 일그러진 형태들

울부짖는 빗방울들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시인의 말

 

두 발로도

걸어갈 수 없는 길이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손을 잃어버렸다.

 

수면 아래의 세상에서

수면 밖의 세상을 그리워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

 

가라앉는다.

더 깊이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