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변주 - 하외숙
먼저 말 걸어오는 바람을 좋아하나요?
뿌리도 없는 것들이 어찌 천 년을 사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길들여지지도 않는 수많은 바람의 길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그림자로 따라다니다
어두운 밤길 달리면서도 멈출 수 없는
태풍처럼 심장을 관통하고 떠나는 바람의 등
창문을 열고 구월의 달력을 넘기자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펄럭임
굳은 언약도 무의미해지는 순간,
바람이라 했네
깊이를 알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은 한 순간이었던가
수시로 베갯머리 파고드는 달뜬 몸살은
풍로의 바람처럼 활활 타올라
당신이 아니었다면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을
꿈결에 일어나 흐느끼는 바람을 본 적 있나요?
*시집/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 시와반시
바람의 가출 - 하외숙
며칠 잠잠한가 하더니 바람이 또 분다
유목민 피가 흐르면 속수무책이지
빗장 걸어놔도 널뛰는 방랑벽은 담장을 넘듯
길 떠나는 것들은 바람의 본적지를 기억하는지
물 비린내 풍기는 강가로 찾아가지
쓰러진 나무 둥치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강 건너 노을
강나루 덤불 사이 새들의 날갯짓 푸드덕거리고
큰물진 강물로 너울 뒤집어쓴 미루나무
쿨럭, 쿨럭이며 돌아눕는 강물
강가에서 마주친 것들은 서로의 고향을 묻지 않지
바람의 귓속말, 노을빛에 한동안 빠져 있다가도
자그럽 그럽 쌀 씻는 저녁이 오면
익숙한 밥 냄새 따라 자박자박 집으로 돌아오지
하루를 한껏 잡아당겼다가 슬쩍 놓아 버린 고무줄처럼
# 하외숙 시인은 경남 거창 출생으로 2016년 <대구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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