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난의 잉여 - 조기조

마루안 2021. 9. 26. 19:05

 

 

가난의 잉여 - 조기조


중년이 되면서 연이어
허리띠 구멍을 늘이고
목 단추를 끼우기 힘들 정도로
군살이 늘어 은근히 걱정이다

살아오는 내내 가난했는데
중년에 느는 군살을 보며
필요한 양보다 많이 먹은 몸을 보며
가난조차 잉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고도 남는 것을 위해
싸우지 말자던 생각이나
미래를 위해 쌓아두지 말자던
거침없는 주장을 되새김질한다

가난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중년의 잉여가
똑바로 걷고자 해도 뒤뚱거리게 한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욕망의 무게 - 조기조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서 무언가를 버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나 동기간도 일부러 덜 만났다

시위가 있는 광장에 나가도 먼발치에서 서성이거나

글쟁이들과 될수록 어울리지 않았다

혹하지 않아야 한다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어떻게 보면 21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정확히는 아버지가 죽은 나이가 되면서부터

집착했던 것들을 하나둘 놓기 시작했다

집과 일터까지의 사이에 놓인 길 위에서도

만나는 사람에게마저 데면데면 굴었다

누구의 권고도 충고도 훈계도 사양하며

힘들었다 무언가를 쌓아가는 것보다 버린다는 일이

힘들었다 꼭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버리고도 미련을 갖는 마음이 힘들었다

힘들어 하면서도 눈만 뜨면

어디 버릴 게 없을까 둘러보았다

그렇게 그렇게 쉰 줄이 절반이 넘은 어느 날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한다는 약을 처방받던 날

비로소 욕망의 무게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