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과녁은 빗나가거나 묘미를 찾거나 - 김지헌

마루안 2021. 10. 9. 21:22

 

 

과녁은 빗나가거나 묘미를 찾거나 - 김지헌

 

 

목표물을 살짝 비켜갈 때

이미 빈틈은 뒤통수를 보이고 말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도

이미 빗나간 화살이 관통한 곳

목표지점에서 빗나가는 것이 생의 묘미라는 듯

생각도 말도 자꾸만 과녁을 비껴가

엉뚱한 곳에 꽂힌다

 

타클라마칸의 오지 여행가처럼

검은 고비의 길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모래 위에 지문 하나 남기지 않고

애초의 과녁은 잊은 채

허밍을 날리며 돌아온 적이 있다

어디에도 나의 단서를 드러내지 않았다

저녁 식탁에서 당신과 내가

같은 석양을 바라보게 될 줄 몰랐듯이

 

지금 여기는 어쩌다 빗겨 간 우연

대륙 어딘가에서는 폭우가 마을을 삼키고

가족을 뿔뿔이 해체시키며 악마의 혀를 날름거리지만

지금 나의 빗소리는 애인의 손가락처럼 섬세한 맛

해체와 몽상 사이에서

빗줄기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과녁을 한참 벗어나 두리번거린다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모든 나처럼

 


*시집/ 심장을 가졌다/ 현대시학사

 

 

 

 

 

 

골목이라는 말 속엔 - 김지헌


골목이라는 말은 얼마나 따뜻한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누군가 내다버린 연탄재처럼
다친 무릎에 빨간약 발라주던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골목이라는 말 속엔 기다림이 있다
벚나무 아래 작은 의자 하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둠이 먹물처럼 번지는 시각
생 무를 깎아먹는지
창밖으로 도란도란 들리는 목소리

골목이라는 말 속엔 아이들이 있다
너무 늙어버린 골목이지만
여전히 몽환 같은 밤을 낳아
여자들은 열심히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쑥쑥 커서
누군가의 애인이 되어 역사를 이어가는
골목의 불멸

골목이라는 말 속엔 모르는 내가 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여전히 절망과 희망이 번갈아 다녀가는
골목이라는 말 속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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