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서쪽에서 부는 바람 - 박상봉

마루안 2021. 10. 9. 21:39

 

 

서쪽에서 부는 바람 - 박상봉

 

 

때로는 서쪽에서 바람이 불기도 한다

 

바람이 하는 일은 나무의 잔가지를 흔드는 것이지만

한뭉치 댓바람이 불어와 나무둥치를 흔들거나

뿌리째 뽑아놓고 가기도 한다

 

더러는 바람에 가슴이 베일 때가 있다

깊이 파인 상처와 그만큼의 흉터를 남기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우기가 다가오는 기미를 먼저 알리는 것도

바람의 일이다

바람이 한바탕 구름을 몰고 올 때가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나는 좋아한다

나 대신 울어주는 비바람이 고맙기 때문이다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 곰곰나루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 박상봉

 

 

갈수록 이명이 들린다

미처 알아듣지 못한 말 남겨둬야겠기에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나무에 박인 옹이 같은 것들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나중에 꺼내 볼 요량으로 넣어둔 것들

그러나 정작 서랍을 열어 보는 경우는 드물다

 

언젠가 우연히 서랍을 열었을 때

잃어버린 귀를 찾은 반가움이란

집 나간 아이를 만난 것만큼 살가운 일이다

 

귀를 꽂고 나니 바다가 보인다

언젠가 무작정 기차를 타고 가서 만난

한때 연인이었던 바다

언제 나를 따라와 얼마나 오래

서랍 속에 머물렀던 걸까?

 

서랍에 넣어둔 구름을 꺼내어 본다

청춘을 기록한 구름의 목록은

공증이 필요 없는 신원보증서

 

삶의 칸칸마다 미주알고주알 채우고 살아온

일기장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오늘은 지구의 모퉁이로 우두커니 밀려난

낡은 서랍장에 모자를 벗고 머리를 집어넣는다

 

파도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삐걱거리며 살아온 세월이 어쩌면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 박상봉 시인은 1958년 경북 청도 출생으로 1981년 박기영, 안도현, 장정일 등과 <국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 <카페 물맹맹>, <불탄 나무의 속삭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