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천문의 즐거움 - 김선우

마루안 2021. 10. 10. 19:22

 

 

천문의 즐거움 - 김선우


하늘을 오래 바라보다 알게 되었다 
별들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것들이 
어찌어찌 모여서 새로운 별들로 태어난다는 거 
숨결에 그림자가 있다는 거 
당신도 나도 그렇게 왔다는 거 
우리가 하나씩의 우주라는 거 

수백억광년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른 
빛의 내음 
소리의 촉감 
온갖 원자들의 맛 

지구에서 살아가는 나는 가끔 
죽은 지 오래인 별들의 임종게를 발굴해 옮겨 쓴다 

그대들이 세상이라 믿는 세상이여, 나를 받아라. 내가 그쪽을 먼저 사양하기 전에. 

오늘 아침 닦아준 그림자에서 흘러나온 말
임종게가 늘 탄생게로 연결되는 건 아닐 테지만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들이 있어 
우주가 지나치게 쓸쓸하진 않았다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티끌이 티끌에게 - 김선우
-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


내가 티끌 한점인 걸 알게 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
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
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
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
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
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씩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티끌의 스텝,
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 김선우 시인은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내 따스한 유령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