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 한가운데에서 - 이창숙

마루안 2017. 11. 8. 16:20



가을 한가운데에서 - 이창숙



창문에 서늘함이 드리우는 저녁
바람 없이 피는 어둠의 잎새, 그 잎새를 며칠 동안
가만 들여다보니
송글송글 땀자국 맺힌 여름이 발갛게 붉혀 있다
떠나려는 걸까 이젠 내게 손 내밀어 이별을 청하려는 걸까
기쁨이었을 아픔이었을
살아온 만큼이나 실금 쳐진 잎새 한 장 속에 지금은
짧은 햇살 뒤 긴 그늘과 찬바람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다


있음을, 없었음을, 비워행복한것임을, 삶의순환그리고해체정지됨을
꽃도지고인간도지는지상의쓸쓸한거대한늪을사랑하시는
사랑하고계시는하늘은


어느 날 그 잎새 서둘러 가버린 내 사랑처럼
고개 떨구고
가슴 한쪽 잃은 낮달로 손닿을 듯
가끔씩 나를 찾아온다면
바람 없이 피는 어둠의 잎새, 그 잎새가
한때 피 흘린 여름 내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절룩이는 발목 한 그루 나무로 똑바로 설 수 있다면
나 마침내, 마침내 죽을 수도



*시집, <바람든 무, 내 마음에게>, 눈빛








가을 아침 - 이창숙



언제부턴가
마음이 먼 곳
발끝이 시려오고 있었네
눈 감으면 죽음으로 눕는
어젯밤 잠이
놀빛 물든 감나무잎 하나를 주워
아침 식탁 위에 얹어 놓았네


가을이야....


만져 보지 않아도
그대가 살며시 다녀갔다고
가을밤, 그대의 잠은 여전히 늙지 않았노라고
작년에도 그랬듯이
따뜻한 그 말밖에는,
해마다 눈시울 붉게 그대를 맞이하건만
난 그댈를 따라나설 수 없네


기쁨이 슬픔에게 가지 못하듯
슬픔이 기쁨에게 오지 못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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