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흐린 가을비 - 류근

마루안 2017. 11. 3. 12:25

 

 

떤 흐린 가을비 - 류근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흐린 비 온다
자주 먼 별을 찾아 떠돌던
내 노래 세상에 없다
한때 잘못 든 길이 있었을 뿐

 

붉은 간판 아래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같은 추억이
지나간다 이마를 가린 나무들
몸매를 다 드러내며 젖고
늙은 여인은 술병을 내려놓는다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슬픔의 자세를 보여주는
나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신다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


가을이 너무 긴 나라
여기선 꽃 피는 일조차 고단하고
저물어 눕고 싶을 땐 꼭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잎사귀를 허물면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별자리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흐린 비 온다
젖은 불빛들이 길을 나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 술집 쪽으로 가고
추억 쪽에서만 비로소 따뜻해지는
내 슬픈 잎사귀 또 비에 젓는다

 

 

*시집,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獨酌(독작) - 류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 가을이 긴 나라에서 사랑은 이렇게 아픈 것인가. 이별한 사람에게 이번 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말자는 다짐이 참 역설적이다. 지독한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떠난 사람을 돌아보기엔 올 가을이 유난히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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