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울림 혹은 떨림 - 조항록

울림 혹은 떨림 - 조항록 줄마다 끊어지고 녹이 슨 낡은 기타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명 때문이라네 한때는 음악이었으나, 그리하여 때론 독주이고 때론 반주였으나 이젠 빈 몸통뿐인 생애 무릎에 점점 물기가 말라가는 친구들이 목련 꽃잎처럼 모여 앉은 날 기타는 홀로 줄 없는 연주를 하네 기타는 몸통을 빠져나온 파장이 어깨를 툭 치거나 가슴을 쓱 쓰다듬거나 헛기침을 시키거나 낡은 기타 안에는 70년대와 80년대와 90년대의 푸른 노래들이 가득하지만 지금은 빈 몸통의 공명만 울리는 시절 울먹이는 손가락들이 허공에서 떨리는 때 *시집, 지나가나 슬픔, 천년의시작 노량진을 지나며 - 조항록 버스 안 키 작은 재수생의 옆구리에 이라는 제목의 책이 누워 있다 출판사도 저자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었으나 그건 내가 과..

한줄 詩 2017.11.15

세련되지 못한 가을비 - 박석준

세련되지 못한 가을비 - 박석준 11월 가을비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어둑해가는 시가의 불빛들이 보인다. 낮게 깔린 상가의 불빛 아파트 고층 검푸른 빈칸에 점점이 찍힌 불빛. 집으로 가는 인도에서, 코너에 젖어 있는 은행잎들 -쓴 데도 없이 털려나간 돈. -밥을 안 먹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 -뜬금없이 여름휴가, 후지산 등산하러 갔다던 변호사 제자의 얼굴 가라앉는다. 내가 사는 집 네 식구들, 가을비 우우우우 우우우우우 소방차 사이렌 소리, 비가 오는데 머릿속에 들어선 내가 빌려 사는 아파트. 몸에 소름이 돋는다. -집 쪽이 아니구나. 상가 쪽인가? -불빛들, 어디서 불이 났을까? 그대로 비 젖은 인도를 걷는다. 사람같이 살려면 여러모로 돈을 써야 하는데 아빠, 나 메이플 하고 싶어. 자본이 필요해. -세..

한줄 詩 2017.11.15

인연 서설 - 문병란

인연 서설 -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 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풀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 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

한줄 詩 2017.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