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가 별이었다면 - 박흥식

마루안 2017. 11. 11. 22:59



우리가 별이었다면 - 박흥식

 


우리가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슬픔이나 기침, 가난이나 두려움이 아니고
시린 저 하늘 끝 눈물겹게도 챙챙한 설움이었다면
울긋불긋한 가을날
추수를 끝낸 논바닥에 흩어져
시끌벅적하게 놀아도 좋은 참새떼였더라면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먼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었다면
우리가 사람이 아니고
어차피 반짝이거나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꽃 피거나 꽃 지거나
여러 숱한 터울에도 고스란한 씨앗의 씨앗으로 보듬을 수 있었다면
별이었다면
아, 우리가 결코 사람이 아니고
슬픔이나 기침, 가난이나 두려움이었더라면

 


*시집, 아흐레 민박집, 창작과비평

 







아흐레 민박집 - 박흥식



이슬 내린 뜰팡서
촉촉이 젖어서 자던 신발들이 좋다
모래와 발바닥과 강물이 간지럽다
숙취 하나 없다
아침부터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이 바람
바람의 살
그 살결의 허릿매가 저리게 좋다
돌아갈 곳을 가로막는
파꽃 같은 이 집 돌아온 따님이
들어가 나오지 못하는 부끄러운 부엌
그 앞을 종일 햇살로 어정대서 좋다
병 주둥이 붕붕 울리며 철겹게 논다
그렇게 노는 게 좋다 한다
안 떠나는 게 좋아서 아흐레 민박집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던
바람의 속살이 잠을 설쳐서
마냥 이 집이 마음에 좋다.

 





박흥식 시인은 1956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1992년 <자유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마흔을 넘긴 뒤늦은 나이에 시집을 냈는데 그 시집이 바로 그가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시집인 <아흐레 민박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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