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폭설 - 육근상

폭설 - 육근상 제설차 한 대 오지 않는 세상 어디로 가야 하나 오촌 댁이라도 가볼까 거기도 죽는 소리 한가지인데 대학이랍시고 나와 눈만 높아져 악다구니 쓰던 막내 년 뛰쳐나간 지 넉 달째 소식 없고 엄니는 잠결에도 막내만 부르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 가 취직자리 부탁해야 하나 어스름 눈길 미끄러져 부속고기 집에서 소주 마시다 보면 실없이 웃음 헤퍼지는구나 싸대기 때리는 눈발만 바짓가랑이 부여잡고 울어쌓는구나 *시집, 절창, 솔출판사 면벽 - 육근상 재래시장 쪽방에서 소주 마시는 날 있지만 날리는 눈발이 별소릴 다하며 어르는 날 있지만 한 숟가락씩 뚝뚝 떠먹는 순대국밥은 알까 사는 일 각박하여 싸움이라는 말 생겨나고 눈물이라는 말 생겨나고 깨진 세간살이가 생겨난 것인데 사내라는 말 앞에서 왜 울화통이..

한줄 詩 2017.12.24

태백, 겨울 - 이은심

태백, 겨울 - 이은심 ​ 너와집 정지간에서 장작불을 지피는 아낙은 아이 셋 낳고도 동아줄 타고 하늘에 오르지 못했다 자신밖에는 구해줄 이가 없다고 굳세게 우거지는 뒷산 나무들 그 밑둥에 덧대어 차린 밥집 마당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얼어붙어 칼이 되었다 투명한 날개옷 한 벌도 아낙의 가슴에서 평생 버석거릴 터 신탁을 깨트린 눈이 내리고 사모하면 더 깊어지는 적막강산 사실보다 더 아름다운 환상은 없다 눈 쌓인 아침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밥을 푸는가 아낙의 반쪽 옆얼굴이 어룽져 갈라터진 바람벽에 하마 해를 넘겼을까 다리 다친 까치들이 글자를 찍어놓았다 - 어서 빨리 오십시요 - 꼭 또 오십시오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안개 - 이은심 저 물 속에 무슨 가슴 터지는 이 있어 줄담배를 피어대나 그..

한줄 詩 2017.12.23

되돌아오는 것들 - 박승민

되돌아오는 것들 - 박승민 누런 설탕에 쟁여둔 산복숭아 체액을 자꾸 밖으로 게워낸다 마지막 병상에서는 너도 물 한 모금도 거절했지 복숭아뼈를 간신히 감싼 거죽만 남은 달이 붕 떠 있다 살을 고스란히 받아낸 노르스름한 당(糖)은 너의 일생을 농축한 습(濕)이었다고 화장장, 뼈를 태우고 구름 위로 노래하듯 풀려나가는 저 연기는 새로 받은 몸의 어떤 형상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옛 얼굴은 멀리 후생(後生)까지 밀려갔다 가는 이따금씩, 끊은 담배 한 대의 간절함으로 기어코 되돌아오고야 마는데.....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12월의 의식(儀式) - 박승민 -다시 명호강에서 시집(詩集)을 강물로 돌려보낸다. 봉화군 명호면, 너와 자주 가던 가게에서 산 과자 몇 봉지 콜라 한 캔이 오늘의 제수..

한줄 詩 2017.12.22

심수봉 - 김경미

심수봉 - 김경미 적막하구나 강산 겨울 네 노래를 듣노라면 너무나 평범하던 여대생 뽕짝 들고 나온 가수에 우린 웃었지 노래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고 겨울 밤 네 목소리는 밀주구나 목이 아프다 가슴이 시큰거려 오늘 밤도 잠자기는 글렀는데 겨울 눈 널 따라 천지를 뒤숭숭 흐린 이 강산 가수로 태어나 여성억압사 남한 현대사 호주머니 속 꼬깃 꼬깃 잊고 빨아버린 지폐처럼 값 잃은 한, 뭉뚱그려 나는 행복한 널 왜 떠돈다고 맺힌다고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귀가 - 심수봉 어린 나이에도 눈치챌 수 있었지 가난과 싸움과 기도소리만 들끓는 집 되도록이면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려고 언제나 가장 마지막까지 동네 아이들 붙잡고 땟물 낀 얼굴로 늦은 밤까지 놀지만 노는 틈틈이 어린 가슴을 파고들던..

한줄 詩 2017.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