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별, 먼저 죽은 친구에게 - 장석남

마루안 2017. 12. 23. 19:17



기별, 먼저 죽은 친구에게 - 장석남



노래를 좋아해 나는 어느날
전기 기타를 사다가는
무슨 곡조를 알아서라기보다는
그저 이런저런 길고 짧은,
높고 낮은 音들을 만지면서
더듬으면서
앉아 있기도 한다네
그러면 기타가 봄이 온다는
소리도 낸다네 지금은 한겨울이니까 그 소리는
금이 간 채 피어오르는 목련꽃 아래께에
가서나 들어보게
소리가 거기까지에서 들리거든
내게 기별을 해주도록
그 기별은 전화로보다는
봄날이라도 아주 가끔씩만 볼 수 있는
는개 같은 게 뜨는 것으로다
해주게나
그게 좋아 자네나 나나 좀
기별에도 얼만큼은
가려져 있는 게 좋아
거기서도 여기서도
는개 같은 눈을 뜨고 서로
한데를 바라보아도 좋아
그 기별중에
봄은 가도 좋아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비평








허공이 되다 - 장석남



강아지를 가지러 왔다
한 마리를 슬며시 쓰다듬어 안으니
어미가 손안 새끼의 귀를 핥는다
입을 핥는다
이제는 영 이별이구나
대문 밖으로 나서서 새 주인에게 건네주어도
어미는 울음소리도 없이
그저 담 위로 두 발을 얹은 채
밖을 내다본다
나는 어느 쪽을 바라봐야 할지 몰라 잠시 허둥대었다
들어와 보니 어미는 남은 강아지에게로 가서
입을 핥아준다
그렇게 하나의 이별이 지나고
다음의 이별까지 어미개는
새끼들을 안고 핥고 먹인다
하는 수 없이 한참을 그 앞으로 가 앉아
꾹꾹 누르고 앉아 허공이 되어보기도 하다가
맨 나중엔 나의 일생을
삼켰다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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