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되돌아오는 것들 - 박승민

마루안 2017. 12. 22. 21:34

 

 

되돌아오는 것들 - 박승민


누런 설탕에 쟁여둔
산복숭아

체액을 자꾸 밖으로 게워낸다

마지막 병상에서는 너도
물 한 모금도 거절했지

복숭아뼈를 간신히 감싼 거죽만 남은 달이

떠 있다

 

살을 고스란히 받아낸 노르스름한 당(糖)은 너의 일생을 농축한 습(濕)이었다고 화장장, 뼈를 태우고 구름 위로 노래하듯 풀려나가는 저 연기는 새로 받은 몸의 어떤 형상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옛 얼굴은 멀리 후생(後生)까지 밀려갔다 가는 이따금씩, 끊은 담배 한 대의 간절함으로 기어코 되돌아오고야 마는데.....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12월의 의식(儀式) - 박승민
-다시 명호강에서


시집(詩集)을 강물로 돌려보낸다.

봉화군 명호면, 너와 자주 가던 가게에서 산
과자 몇 봉지 콜라 한 캔이 오늘의 제수용품(祭需用品)

오랜 바람에 시달린 노끈처럼
이 세월과 저 세월을,
간신히 잡고 있는 너의 손을,
이젠 놓아도 주고 싶지만

나는 살아 있어서
가끔은 죽어 있기도 해서

아주 추운 날은 죽은 자를 불러내기 좋은 날

"잘 지냈니?"
"넌 여전히 아홉 살이네!"

과묵했던 나의 버릇은 10년 전이나 마찬가지여서
다만 시를 찢은 종이에 과자를 싸서
강물 위로 90페이지째 흘려만 보내고 있다.
담배 향(香)이 빠르게 청량산 구름그늘 쪽으로 사라진다.

아무리 시가 허풍인 시대지만
그래도 1할쯤은 아빠의 맨살이 담겨 있지 않겠니?

이 나라는 곳곳이 울증이어서
네 곁이 편하겠다 싶기도 하고
히말라야나 그런 먼 나라의 산간오지에서나 살까, 궁리도 해봤지만
아직 너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처럼 너의 물 운동장을 구경만 한다.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뜨거운 살들이 얼음 밑으로 하굣길의 아이들처럼 발랄하게 흘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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