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번 정차할 곳은 - 윤병무

마루안 2017. 12. 24. 19:16



이번 정차할 곳은 - 윤병무



버스가 지나간 자리는
바람의 도미노 게임
눈으로 앞사람의 뒤통수를 밀며
좌석 없는 좌석버스에 오르면
발을 조심해야지 희미한 조명 아래서
스텝이 얽히면 숙녀에게 실례지
25시까지 영업하는 주유소의
춤추는 종업원들의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팔들 머리들
사이에도 틈은 있어라
파고드는 태진아의 녹음 테이프 소리
손수건을 흔들며 임이 오시다기에 흔들었던 손수건 노란 손수건
검정 비닐 봉지를 흔들며 깜빡이는 신호등을
향해 한 여인이 뛰자마자 출발하는 버스의
기어가 걸릴 때 길가에서
돌고 있는 장작 구이 통닭들을 보며
바지 주머니 속의 손이
라이터 부싯돌을 돌린다
엑셀을 밟으면 숨을 멈추자
기어를 변속할 때만 숨을 돌리자


다음 정차할 곳은....



*시집, 5분의 추억, 문학과지성








流星(유성) - 윤병무



만나러 가는 길은
숯불이 타고 있는 수세식 변기밖에 없었지
잠시 문을 열기 위해 집게로 집어낸 숯불들은
스크럼을 짜고는 붉은 몸을 흔들어댔지


드디어 문이 열리고 변기로 통하는 구멍 아래에는
긴 사다리가 준비되어 있었지
결심을 끝낸 그가 변기 속으로 한쪽 다리를 넣을 때
누군가 불도장을 찍듯 어깨를 짚으며
사위어가는 눈빛으로 말했지
-알지? 일단 한번 내려가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어!


그가 까마득한 사다리를
가느다란 빛을 뿌리며 내려오는 동안
밤바람은 무수한 장님들이
잡고 내려간 매끈한 사다리에 찍힌
지문들을 지우고 있었지


그가 살짝 휘어진 사다리를 다 내려왔을 때
어느 눈꺼풀 없는 붉은 눈의 사내를 만났지
지나가는 바람을 잠시 쥐었다 놓아주면서
붉은 눈의 사내는 그에게 말했지
-너를 찾는 이를 알고 있어, 그이는
 단 한 번만의 기회로 너를 만나러 위로 올라갔어
 그런데 너는 왜 여기까지 내려왔지?






#윤병무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대전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5분의 추억>, <고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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