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태백, 겨울 - 이은심

마루안 2017. 12. 23. 19:55

 

 

태백, 겨울 - 이은심


너와집 정지간에서 장작불을 지피는 아낙은
아이 셋 낳고도 동아줄 타고 하늘에 오르지 못했다
자신밖에는 구해줄 이가 없다고
굳세게 우거지는 뒷산 나무들
그 밑둥에 덧대어 차린 밥집
마당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얼어붙어 칼이 되었다
투명한 날개옷 한 벌도
아낙의 가슴에서 평생 버석거릴 터

신탁을 깨트린 눈이 내리고
사모하면 더 깊어지는 적막강산

사실보다 더 아름다운 환상은 없다

눈 쌓인 아침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밥을 푸는가
아낙의 반쪽 옆얼굴이 어룽져 갈라터진 바람벽에
하마 해를 넘겼을까
다리 다친 까치들이 글자를 찍어놓았다

- 어서 빨리 오십시요
- 꼭 또 오십시오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안개 - 이은심

 

 

저 물 속에 무슨 가슴 터지는 이 있어 줄담배를 피어대나 그러면

당신은 말없이

살아 있는 어둠을 광대뼈에 적시고 있지요

말 없을 때가 참 위험한 건데

밤새 더듬어 잡고 있던 내 손에는 당신이 없고

아침 찬란한 햇빛 속에 서서

혹 누가 그 곳에 그리움이 있었다 증거할까 궁금해 하면

당신은 먼산 보는 시늉만 하지요

독감을 앓으면서

이렇게 아픈 세상에서 나만 안 아프려고 하면 쓰겠느냐고 약봉지를 밀어놓으면 우글거리는 슬픔으로 목젖이 뻐근한 당신은

흰 풍경의 두루마리

골짜기 바람 소리만 남겨놓고 사라져 버린 소문이지요

새벽의 길을 걸어 귀천(貴賤) 없는 마을에 도착한 자 당신은

끼룩끼룩 울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저 젖어든 가슴 한 쪽을 지니고 앞서 간 허무란 말이지요

 

 

 

 

*시인의 말

 

대저

이 목록은 가슴을 앓자고 멀리 둔 것들,

때로 나의 생이 작고 구슬픈 소리로 은밀히

부탁했던 것들의 적은 부분이다

영혼의 헛간에서 기이하게 울어대던 새의 울음이나

격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아직 내 안에 고스란하다

 

그리 말자 말하면서도 넘실거리는 감정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나

성실하게 몽상하는 일에 등한했음을

그리하여

그대들 섬섬옥수로 돌을 던지면 맞을 만한 자리에

이 기록을 놓아둔다

때가 늦어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

릴케가 그러했듯 끊임없이 반란하는 마음을 자식처럼 품고

마침 말채나무숲을 지난다면 눈여겨 채찍 하나 얻으리

 

잘 가라 불온한 문서들이여

통속한 거리에서

대접받기를 바라지 않으매 걸망에 이슬이 맺힐지라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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