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홀로 인생을 읽다 - 고재종

마루안 2017. 12. 21. 22:25



홀로 인생을 읽다 - 고재종



페이지 페이지마다 저항한다
재미없고 어렵고 빡빡한 이따위 책이라니
건성건성 지루함을 뛰어넘고
알 듯 알 듯한 문장만 내 마음껏 해석해 버린다
하지만 행간에 얼크러진 미로들과
딱딱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발을 거는 맥락의 숲이 부르는 유혹들
그 속으로 다시 길을 잃는다
피로 씌었다니 온몸으로 읽어야지
나는 미련하고 오기 창창하여서
절벽에 부딪고 심연에서 소리 지른다
그 어떤 책도 저 혼자인 책은 없다지 않나
수많은 이미지의 난무와
겹겹 숨어 버린 의미들의 여러 시간
제기랄, 한 귀퉁이에서 잡념이나 낙서하다가
다시 페이지를 넘기면 삶의 황홀한 서정들
그다음 페이지엔 죽음의 혹독한 서사
생과 사는 앞뒷면으로 반복되는데
말도 안 되거나 말하기 싫어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담론처럼
말하고 싶으나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의
징후까지를 짐작해보는 시간은 깊고 깊다
이걸 혈투라고 해야 하나
혈투 끝 폐허라거나 숭고라고 해야 하나, 내게
주어진 古典이 의도하는 것과
의도하지 않는 것까지 가늠해보는
독서는 마쳤는데 책은 여전히 펼쳐져 있다



*시집, 꽃의 권력, 문학수첩








황혼에 대하여 - 고재종



마음이 경각에 닿을 듯
간절해지는 황혼 속
그대는 어쩌려고 사랑의 길을 질문하고
나는 지그시 눈을 먼 데 둔다.
붉새가 점점 밀감빛으로 묽어 가는
이런 아득한 때에
세상은 다 말해질 수 없는 것,
나는 다만 방금까지 앉아 울던 박새
떠난 가지가 바르르 떨리는 것하며
이제야 텃밭에서 우두둑 펴는
앞집 할머니의 새우등을 차마 견딜 뿐.
밝고 어둔 것이 서로 저미는
이런 박명의 순순함으로
뒷산 능선이 그 뒤의 능선에게
어둑어둑 저미어 안기는 것도 좋고
저만치 아기를 업고 오는 베트남 여자가
함지박 위에 샛별을 인 것도 좀 보려니
그대는 질문의 애절함을
지우지도 않은 채로 이제 그대이고,
나는 들려오는 저녁 범종 소리나
어처구니 정자나무가 되는 것도 그러려니
이런 저녁, 시간이건 사랑이건
별들의 성좌로 저기 저렇게 싱싱해질 뿐
먼 데도 시방도 없이 세계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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