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값진 불행 - 황학주

마루안 2018. 1. 8. 22:56



값진 불행 - 황학주



동서울 터미널에서 혼자 가던
사랑받는 불행을 보았지
버스만한 파도에 슬몃 따스한 손을 얹은
가슴, 기다리기 위해 혼자 가는
길이 커브를 주는 生의 한 순간을 엿봤지
절친한 심연이 함께 실린
아픔에 네가 타 있는 걸 보았지
변속처럼 눈은 꺼지고 붉은
상처없인 못 가지나 내 사랑
손수건을 쥔 낮고 낮은 손짓이여
검은 눈보라에 하얗게 앉혀진 슬픔에서
처음 제 집으로 가는
단 한 번 커브를 그으며 서울 밖으로 나가는
불행에서 온 사랑이여
읽고 있겠지 이렇게 별빛이 내리면
'내 사랑은 문자 그대로야' 라고 썼던
반 접은 나의 작은 쪽지.



*시집,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혜화당








오게 된 곳이 어딘지 - 황학주



집마다 물소리를 돌리며, 여러 갈래
삶이 늦게까지 비탈과 줄을 맞추는 듯 하다
여기 아픔이 아물만한 거리일까
잃어버리고 온 구두는 물론 애까지
여보, 탕진하고 가야 할까
칼끝이 돌아오듯 그때를 기다릴까
수명이 짧은 것들이 간 길은
밤낮 제 집 짓는 헤매임만 남고
이 흙에 보내어진 삶의
사나운 구애만 남고....
언제나 아플 때 알게 되는 것일까
나의 해안이
더 외로운 자의 해안으로 흘러가
천천히 음식을 익히는
모닥불이 붙는 저녁을 가지지 못한
이 곳이 어딘지
남은 식구들은 그 때문에
어디서 밥을 지을지 모르는 나의 저녁을 알고 있을까
여보 산수유꽃 채 피지 못한
산수유 개골창길에서 만난
슬픈 사랑으로 아프게 나를 닦아주었는가
상처진 내 낡은 목을 안고
우는 애까지 달래며 밤새
침을 발라주었는가
다시 누가 날 그렇게 우아하게 눈동자 안에
넣어 주겠나
저 골목 끝으로 스스로 언덕을 대놓고
십자가여, 내 허리를 버리고
홀로 팔다리를 찢을 때까지
한번만 더 내 사랑을 기다리게 하렴.






# 요즘 이 시인의 시를 꼼꼼히 다시 읽고 있다. 가장 시인같이 생긴 사람이면서 꾸준하게 시를 쓰고 있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오래된 시집을 들추며 어리숙했던 지난 날을 반추한다. 나는 왜 이런 시에 오래 눈길이 가는 걸까. 마음 가는 시가 좋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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