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용할 양식 - 원무현

마루안 2018. 1. 6. 19:21



일용할 양식 - 원무현



하반신이 잘려나가고 없는데도 살아 움직이는 개미를 본다
간혹, 빵 부스러기를 나르다 말고 멈칫거린다
풀밭에 묻힌 하반신이 기억나는 것일까
상반신 뿐인 자신을 깨닫고 고통에 휩싸이는 것도 잠시
이내 노동에 몰입!
이 얼마나 약효 뛰어난 진통젠가
일용할 양식이란,


경리담담으로서는 치명적 결함인
역행성건망증에 시달리는 사내가
대차대조표에 박은 코를 빼고 창가를 서성인다
어쩌다 삼십 년 건너편에 묻힌 이십대
그 싱싱한 시절이 생각났던 것일까
젊은 클라이머처럼 빌딩 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문득
소변보고 몇 시간째 올리지 않은 지퍼를 발견하곤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도 순간일 뿐
이내 노동에 몰입!
얼마나 약효 뛰어난 각성젠가
일용할 양식이란,



*시집, 강철나비, 빛남출판사








의자를 먹다 - 원무현



방금 퍼 담은 밥에 파리가 앉았다
쫓고 또 쫓지만 한사코 올라앉는 이놈은
살얼음 낀 똥 막대기에 붙어있던 녀석이다
내가 먹을 밥이 미끄러질 염려 없는 의자란 말이지?
지친 몸이 걸터앉을 수 있으면 뭐든 의자가 되는 걸까
잠시 의자에 앉혀있는 의자의 구조와 기능을 일으키는 사이
놈은 다른 녀석들까지 데려와서 눌러앉을 기세다
나는 밥 뜨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
내 밥을 남이 손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늦기 전에 얼른 먹고 일터로 가야한다
좀 더 나은 내일을 구하기 위해 혹사 시켜야할 몸이 믿을 것은
이 한 그릇의 고봉밥
목숨을 걸고서라도 앉으려 하는 파리들의 의자가 따끈하다






# 원무현 시인은 1963년 경북 성주 출생으로 1994년 시집 <너에게로 가는 여행>, 2003년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홍어>, <사소한, 아주 사소한>, <강철나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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